티스토리 뷰

일반 칼럼

[산책자]책은 경제적이다

opinionX 2018. 9. 10. 15:14

요즘 나는 유랑자가 따로 없다. 정처는 있지만 돌아다닌다. 부산에서 순천으로, 김해로, 서울광장으로, 다음주에는 제주도로 간다. 모두 책 행사를 치르기 위해서다. 지방 독자를 만나는 일은 사뭇 의미도 깊다. 책이야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만나도 되지만, 책이 특별한 추억이 되는 건 뜻밖의 장소에서다. 독자도 같은 마음인지 그런 곳에서 우리는 어색함을 떨치고 띄엄띄엄 말을 주고받는다.

<!--imgtbl_start_1--><table border=0 cellspacing=2 cellpadding=2 align=RIGHT width=200><tr><td><!--imgsrc_start_1--><img src=http://img.khan.co.kr/news/2018/09/09/l_2018091001000950000080201.jpg width=200 hspace=1 vspace=1><!--imgsrc_end_1--></td></tr><tr><td><font style=font-size:9pt;line-height:130% color=616588><!--cap_start_1--><!--cap_end_1--></font></td></tr></table><!--imgtbl_end_1--> 출판사 이름이 익숙지 않다는 독자부터 출간된 거의 모든 책을 꿰뚫는 독자까지 반갑기 짝이 없다. 사실 나누는 이야기를 정보라고 생각하면 독자의 시간이 아깝다. 검색하거나 직접 책을 들춰보면 되는 것이니까. 그런데 대화라고 생각하면 이야기가 다르다.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행사장에 나오는 독자는 책에 관심이 높은 편이라서 서평에서 볼 수 없는 직설적인 평을 하기도 한다. 살면서 방심하고 내가 사는 곳, 주로 만나는 사람의 집단 평가에 갇히기 쉬운데, 서울에서 떨어져 나와 자유롭게 독자들을 만나다보면 새삼 책의 생명력, 살아서 어디든 도착하는 사물의 힘을 깨치게 되는 것이다.

행사장에서 독자를 만나는 즐거움 못지않게 출판사 대표라는 본업을 내려놓고 저자를 만나는 즐거움도 상당하다. 여름의 책 행사장에서 만났던 은희경 작가의 ‘고전의 모방과 재해석’이라는 경쾌한 특강은 지방을 유랑할 때도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전 글이 안 써질 땐 ‘남의 책’을 읽어요. 글의 영감은 독서에서 나온다고 믿고 있거든요. 여행도 삶의 여러 체험도 글의 영감이 되어주지만 그건 경제적이고 시간적인 여건이 따라줘야 하죠. 체험을 모두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여러 경험을 작가들이 자기만의 어법으로 쓰고 만든 게 책이니, 얼마나 경제적인 체험이 되는지 몰라요.”

책은 경제적이다. 경제적이라는 말, 그러니까 책에서 ‘가성비’란 자기계발서나 학습서에서 듣던 말이다. 책을 통해 빨리 기술이나 삶의 정보를 익히게 하는 데 더없는 책들. 그런데 은희경 작가는 문학작품, 특히 고전이 경제적이라고 강변한다. 사무 공간에 갇혔던 나로선 난데없다.

“책 중에 고전의 탐험은 꽤 전위적인 읽기랍니다. 시공간을 뛰어넘은 작품 읽기는 현재의 삶을 확장해서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니까요.”

인상적인 고전 작품 중 1897년 발표된 <인형의 집>을 패러디하고 재창조한 채만식의 1933년작 <인형의 집을 나와서> 예시를 통해 ‘고전 다시 쓰기’의 의미와 재미를 일러주었다. 시대를 넘어 삶에 묻는 질문, 인간의 지혜를 얻는 매체. 고전 읽기의 필요성을 경제적인 것과 연결하는 발상이 신선하게 여겨졌다.

어떤 계기로 곧 출간될 김경집 인문학자의 책을 교정지로 읽게 되었다. 이 책에도 의미 있는 이야기가 펼쳐져 있다.

“무조건 책 읽자고만 할 게 아니다. 읽을 사람 읽고 싫은 사람 안 읽으면 된다. 굳이 책 읽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에 큰 지장 없다. 대신 주인으로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차피 삶은 선택이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지는 것이다.”

경제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데 책이 이렇게 놓일 수 있다. 인문학자는 이어서 재미있는 제안을 하나 한다. 공원에 1인용 의자를 놓자는 것이다. 벤치는 두 사람이 대화하기에 좋지만 1인용은 책 읽기에 좋으니 의자 팔걸이에 구멍 하나 뚫어서 텀블러나 잔을 꽂아두게 하고 등받이에는 책 그림 하나 그려놓으면 누군가 지나가다 ‘책 읽는 의자’임을 알아채고 다음에 공원 올 때는 책 한 권 들고 올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누가 책 읽는 모습을 본다면 자연스럽게 자극이 될 것이고 멋진 전염이 일어날 것이라는 희망 섞인 상상도 했다.

책 행사장은 여느 행사보다 ‘성공적’이란 말을 조심스레 다루게 된다. 저자 강연장에 독자가 많이 몰리면 성공적이라고 해야 할까. 출판사가 차린 부스에서 책을 많이 팔게 되면 성공적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이런 성황은 환영할 일이지만 곧바로 성공적이라고 말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수치로 책을 말하면 독자와 나눈 책 이야기는 의미가 희석되기 때문이다.

바람 좋은 가을이다. 올해 여름은 우리를 꼼짝 못하게 실내에 가두었다. 마음부터 야외로 나가고 싶어서 들썩인다. 책 야외 행사도 여러 곳에서 열리고 있다. 주말에 서울광장에서는 밤 깊도록 책 읽는 ‘북캠핑’도 있었다. 바람과 책과 내가 만나는 적절한 시기다. 인문학자의 제안대로 공원에서 책 읽기는 또 얼마나 경제적인 일인가. 마음 안팎으로 새로운 바람이 불지도 모른다. 책과 잘 놀았다면 분명 불 것이다.

<정은숙 | 마음산책 대표>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9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