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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책 표지로 인해 고민이 좀 됐다. 10여 년 출판을 하다 보니 남는 건 책뿐이라, 사무실 벽 7단짜리 책장 4개에 그동안 낸 책이 꽉 들어찼다. 권수로는 500권 전후다. 이 책장을 채우는 맛으로 출판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생고생해서 책 한 권을 내면 겨우 우측으로 1~2㎝ 넓어진다. 그렇게 구멍이 휑해 보이던 책장이 어느새 빽빽한 숲이 되어 있는 걸 보니 세월이 유수와 같다.

처음엔 빈자리를 채워가던 기쁨만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눈에 뭔가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한 권 한 권 만들 때는 몰랐는데 모아놓고 보니 좀 어둡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 거무튀튀해 보였다. 내가 블랙 마니아도 아닌데 왜 이럴까. 그 이후로 우리 책의 표지가 전반적으로 밝아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디자이너가 보여주는 여러 시안 중에서 하얀 바탕의 시안을 택한 것이다. 시간이 좀 지나자 책장이 다시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이번엔 멀건 죽처럼 힘이 없어 보였다. 저게 뭔가 싶은 생각이 들 때쯤 파란색, 보라색, 초록색 등을 드문드문 박아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책장이 알록달록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책장을 들여다보다가 아쉬움의 근원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일관성! 표지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적인 흐름이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까치, 길, 마음산책, 휴머니스트, 유유, 문학과지성사 등 내가 아는 많은 출판사 책 표지에는 그 출판사만의 색깔이 느껴질 때가 많다. 바로 일관성이다. 그 일관성도 장단점이 있으리라. 너무 도드라지면 단조로운 느낌을 줄 수도 있을 테다. 어쨌든 한 권 한 권이 아니라 숲을 조림한다는 느낌에서 표지를 조망해야 하는 조급증이 들기 시작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옆 출판사 대표님에게 SOS를 쳤다. 30년 넘게 출판을 해온 이분에게 조언을 들어보자는 생각이었다. 우선 최근 3년간 나온 우리 책 표지 200장을 출력해서 쇼핑백에 담아 전달했다. 한 달 뒤 의견을 듣는 자리에서 그분은 여러 조언을 해줬다. 가장 큰 문제는 표지에 동어반복이 많다는 것이었다. 가령 제목에 쓰인 특정 장소, 사물, 인물이 표지화(배경그림)에서 반복된다는 것이다. 나도 종종 느끼는 문제였다. 이런 식의 동어반복이 의미의 증폭을 만들어낼 때도 있지만 대개는 의미의 충돌과 상쇄로 끝날 때가 많은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반성이 필요했다.

그리고 또 하나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를 해주셨다. 최근 수십 년 사이 표지에서 저자 이름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요즘 대부분의 책이 저자 이름을 쥐똥만 하게 넣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분 얘기로는 디자이너가 처음 판을 짤 때 저자 이름을 디자인의 한 요소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중심 디자인이 있고 마지막 시점에 저자 이름을 적절한 빈 곳에 얹어주는 프로세스이다 보니 저자 이름은 점점 표지 디자인에서 계륵과도 같은 존재가 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였다.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심지어 표지 시안을 잡을 때 저자 이름은 대개 철자가 틀려 있을 때가 많다. 각 시안의 빈 곳에 그런 식으로 들어가니 참고하라는 건데, 그만큼 중요하게 보지 않는다는 얘기다. 경우에 따라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저자 이름이 디자인을 해치는 요소로 여겨지기도 한다. 완벽하게 작품을 만들어놨는데 저자 이름은 그 완결성을 해치고 덧칠을 하게 만든다. 그러니 점점 더 작아지는 것이다. 디자인 대세에 영향을 주지 않게 하려는 것 아니겠는가.

모든 저자는 책의 창조자이자 주인이다.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는 게 옳다. 제목, 저자, 출판사는 표지의 3요소다. 이 세 가지가 잘 조화되게끔 처음부터 디자인이 구상되어야 하지 않을까. 돌아보면 과거의 책들은 대개 저자 이름이 대문짝만 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열 배 스무 배 차이가 있다. 이 또한 격세지감이지만 단순히 세월만 흐른 건 아닌 듯싶다. 화려하거나 예쁜 것에 대한 과도한 집착도 한몫하는 게 아닐까. 물론 과거로 돌아가자는 얘기는 아니다. 우리 시대의 감각에 맞는 ‘표지에서의 저자 살리기’ 시도가 필요해 보인다. 그날의 조언을 듣고 돌아와 나름대로 이러한 생각을 표지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벌써 신간 두 권이 그런 방식으로 나왔다. 저자 이름이 디자인의 중심축으로 활용된 것이다. 아무도 이상하다고 얘기하지 않았다.

아울러 표지의 일관성이라는 건 두 가지가 있다고 본다. 어떤 연역적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밀고 나가는 게 하나 있고,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 뒷심으로 잡아주는 경우가 하나 있다. 저자 이름을 강조한 디자인은 후자에 속한다. 이 작은 변화가 우리 책 표지에 보이지 않는 힘과 아름다움을 심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강성민 |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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