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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시절은 사람과 함께 간다. 철학자 들뢰즈와 가수 김광석이 떠났을 때 나는 젊은 날의 빛이 스러지는 것을 느꼈고, 그로부터 얼마 뒤 영화배우 장국영이 떠났을 때 마침내 소년과 소녀의 계절이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적어도 수사 당국이 발표한 사인은 그랬다. 하지만 그들을 사랑했던 나는 그들의 자기 살해를 좀처럼 믿을 수 없어서 분노했다. 이 먼지와 티끌의 진창 속에 나를 버려두고, 어떻게 자기들만 떠날 수 있나? 그것은 맥없이 흘러버린, 돌이킬 수 없는 시절에 대한 상실감과 배신감이기도 했다.


선배 정은 택시 운전수다. 그는 하루 12시간씩 일주일에 72시간을 ‘바퀴노동자’로 산다. 사회관계망서비스 페이지에 ‘운행일지’라는 제목으로 올라오는 그의 일상을 엿보노라면 평지에서도 멀미가 난다. 새벽부터 겨울비 내리던 어느 날, 행신동에서 첫 손님을 불광동 서부터미널에 모시고, 녹번역에서 응암역에 갔다가, 응암역에서 서북병원, 병원에서 다시 응암역, 역에서 서대문구청, 구청에서 홍제역…. 


짙은 먹구름과 겨울비로 사위가 컴컴한 가운데 광화문에서 공덕역, 용강동에서 혜화동, 탑골에서 애오개역, 역에서 증권거래소, 마포 가든호텔에서 한국경제신문, 충정로에서 애오개, 국회에서 마포세무소, 다시 가든호텔에서 신촌 현대백화점, 백화점에서 홍제역, 무악재역에서 광화문 동화면세점, 정동에서 충정로…. 


숨 가쁜 오전이 지난 자리에 밀려온 허기를 돼지국밥 한 그릇으로 헐후히 달랜다. 1회 승차당 평균 운임 3000원 정도. 시간당 생산성 따위를 묻지 말라고 한다. 하루 종일 열나게 ‘뺑이’쳤으나 입금하고 가스비 내고 나니 겨우겨우 ‘똔똔’이란다. 허무의 극치, 그는 쓰게 웃는다.


사실 정은 예전에 시인이었고 지금도 시인이다. 하지만 택시를 몰기 전까지 누항에서 밥벌이를 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시가 교차로 신호를 무시하고 중앙선을 함부로 넘어 역주행 전속력으로 달아나는 것을 자해적인 폭음과 폭주로 견뎠다. 하지만 ‘바퀴노동자’로 살아낸 지 4년 만에 그의 얼굴은 4년 전과 전혀 달라졌다. 담배를 끊고 술을 일주일에 한 번만 먹어서라고 하지만, 그동안의 지난한 노동이 어떤 신비로운 방식으로 그를 변화시킨 것이 분명했다.


혼자 놀고 혼자 일하기에 익숙한 내가 가장 그리워하면서 가장 괴로워하는 게 사람이다. 그런데 선배는 매 순간 낯선 사람이 문을 벌컥 열고 들이닥치는 나날을 어찌 견디는가, 육체노동도 고단하지만 감정노동 또한 만만치 않잖은가 걱정하며 물으니, 그가 엉뚱한 대답을 내놓는다. 


술에 얼근해져 시름을 객기로 울분을 시비로 터뜨리려는 취객을, 지름길 놔두고 돌아가는 게 아니냐며 쌍심지를 켜는 찰짜를, 세상의 별의별 일로 쌓인 설움을 별의별 생트집으로 풀어내려는 ‘진상’ 손님을 상대하는 그 나름의 비법이 있다는 게다. 그의 택시를 타면 어김없이 들을 수 있다. 


‘젖은 듯 보송보송하고/ 서걱서걱한 듯 촉촉하고/ 즐거움인 듯 아파하고/ 아픔인 듯 다독여 어루만지는’ 그 목소리. 김현식이면 어떨까 하니 철금성은 호불호가 갈려 잘못하면 시비가 붙는단다. 유재하는 괜찮지 않나 하니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단다. 


그래서 김광석, 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사라졌지만 가객에게는 영원한 젊음을 곱씹으며 ‘신파인 듯, 아닌 듯/ 꿈인 듯, 아닌 듯’한 그 노래를 듣노라면 취객도 찰짜도 진상도 하나같이 조용해진다고 한다. 어쩌면 그 약속한 듯한 침묵은 각자의 지난 시절에 대한 애도이리라(작은따옴표 안에 정기복 시 ‘김광석’을 인용함).


가수 김광석의 '다시 부르기1'(1993/서울음반)(출처 :경향DB)


정은 구르고 구르는 일상을 ‘내 바퀴의 윤회, 윤회의 내 바퀴’라고 부른다. 고되고 위험한 노동인지라 성급함도 성냄도 다 비우고 조심조심 견딘다. 회사 택시의 한 달 만근은 26일, 하지만 삶의 생기를 찾고 성찰의 시간을 갖기 위해 빠듯한 시간을 쪼개어 일주일에 한 번씩 산에 오른다. 바퀴의 굴레에서 잠시 벗어나 백운대, 향로봉, 연주대, 형제봉에 올라 지난 실패와 여분의 희망을 곱씹으며 또다시 바퀴를 달릴 기력을 찾는다. 


그의 노동과 바퀴가 달아나는 시를 따라잡을 때, 그의 택시에서 함께 달리는 김광석도 잃어버린 시절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추억까지도, 어쩔 수 없는 현재진행형이다.


김별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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