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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멈퍼드의 <역사 속의 도시(The City in History)>는 19세기 도시의 산업화를 석탄도시란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대규모 생산공장으로 변모한 도시는 24시간 내내 (노동자에게) 쉴 틈을 주지 않는, 굉음과 연기를 뿜어대는 침침한 벌집이 되었다. 과거에는 죄수에게나 내려지던 형벌이 이제는 (자본가의 강요로) 도시 노동자의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아이가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는 격언이 있으나 (이익에 눈이 먼 자본가에게) 그저 무시되는 옛말일 뿐이었다.”
석탄도시는 자본가의 지속적인 부귀영화를 위해 만들어졌다. 도시의 가장 좋은 공간은 온종일 석탄을 태우는 공장이 차지하였으며, 공장에서 쏟아지는 공해와 폐기물이 공기를 더럽히고 강을 새까맣게 물들여도 자유방임이란 명목으로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았다. 몇몇 권력자와 자본가를 제외한 모든 인민은 자본의 이윤 창출을 위해 쓰이는 생산요소일 뿐이었고, 노동자 대부분은 불결하고 비좁은 빈민굴에 거주하였으며, 10대도 되기 전에 공장에서 착취를 당하였다. 열악한 환경과 노동착취로 인해 20대를 맞이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애덤 스미스는 자본가가 제멋대로 굴게 두면 이처럼 사회가 망가질 것이라고 진단하였다. <국부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상인과 공장주 두 계급은 사회의 이익보다는 자기 계급의 이익을 더욱 고려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제안을 항상 경계하여야 한다. 그들의 이익이 결코 공공의 이익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으며, 사회를 기만하고 심지어 억압하는 게 그들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주류경제학과 신자유주의자가 전가의 보도처럼 여기는 ‘보이지 않는 손’은 <국부론>에 딱 한 번 등장한다. “각 개인이 최선을 다해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서, 사회의 이익을 의도할 때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경우가 흔히 있다.” 여기에서 각 개인은 탐욕스러운 자본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없다. 앞서 보았듯 자본가의 이기심이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고 지적하였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자본가에게) 특혜를 주거나 (노동자에게) 제한을 가하는 모든 국가의 제도가 완전히 철폐되면 자연적 자유의 제도가 스스로 확립된다. 이때 모든 사람은 ‘정의의 원칙’을 위반하지 않는 한, 완전히 자유롭게 자기의 방식대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으며, 자신의 근면과 자본을 바탕으로 다른 누구와도 그리고 다른 어느 계급과도 완전히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다.” 이를 자본에 대한 규제철폐와 자유방임의 근거로 대는 건 진의를 왜곡하는 파렴치한 짓이다.
<국부론>에 적힌 ‘레세-페어(laissez-faire)’는 자본가에게 유리한 국가의 불공정한 간섭, 즉 정경유착과 공권력에 의한 노동탄압과 같은 부조리에 대한 비판이었다. 만약 현재와 같은 사회조건이었다면 자본가의 과도한 욕심을 제어하고 올바른 노동임금을 보장하고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법으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250년 전에 최저임금도 아니고 생활임금의 필요성에 대해 논하였던 경제학자다.
갑자기 옛 책을 두 권이나 떠올린 이유는 <스트레이트>라는 시사프로그램에서 다룬 화력발전소 노동현장의 참혹함 때문이다. 김용균씨 같은 노동자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제도개선은 미진하고 작업 조건과 노동 착취가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힘든 환경이라면 죽기 전에 얘기하지 그랬냐는 경영자의 어이없고 파렴치한 답변을 듣자니 우리의 현실이 19세기 이전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걸 새삼스레 떠올리게 된다.
오랜 세월 정부, 국회, 사법부, 재계, 학계에 뿌리를 내리고 우리 사회를 망가트리고 있는 세력은 보이지 않는 손과 시장의 자유를 제 입맛대로 해석하며 자본에 모든 걸 넘기고 간섭하지 말아야 좋은 세상이라고 우기고 있다. 더는 애덤 스미스를 모독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국부론>을 번역한 김수행 교수의 말이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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