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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 경제평론가

인간이 자의적으로 유장한 시간의 흐름을 토막낸 탓에, 이즈음이면 흔히 이런 질문을 듣게 된다. “내년 경제, 어떨 거 같아요?” 2007년말부터 내 대답은 같았다. “빚 갚으세요. 집이나 주식이 있다면 파시는 게 나을 거에요.”(실제로 나는 금년 초에 집을 팔았다) 매년 똑같은 답을 했으니 자기 생계 하나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내 무능함을 여실히 증명한 셈이다. 그러나 금년에도 내가 할 수 있는 답은 마찬가지이다.

내 ‘예측’(?)이 비껴 나간 걸 굳이 변명하자면 2008년말부터 2009년초까지 전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동시에 돈을 풀고, 또 확대 재정정책을 썼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다. 넘쳐나는 유동성은 패닉을 막았고 정부의 지출은 성장률을 높였다. 그러나 돈은 여전히 금융기관에서 단기 금융시장을 오가는 함정에 빠져 있고(유동성 함정) 기대했던 재정의 승수효과(풀린 돈이 소비가 되고 다시 투자로 이어지는 것)는 신통치 않았다.

재정 확대의 약발이 떨어지자 미국의 성장세는 움츠려들고 실업율은 여전히 10%를 맴돌고 있다. 디플레이션의 가능성이라는 점에서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닮았으며 실업률의 양상은 70년대 이래의 여느 경기침체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럽은 더 심각하다. 아이슬란드, 그리스 그리고 포르투갈로 이어지고 있는 재정위기로 더 이상 유럽의 소비 진작도 불가능하다.



토건에 기댄 장밋빛 전망 위험천만

한국은행은 12월10일 ‘2011년 경제전망’을 발표했다. 금년 6.1%의 성장보다 다소 둔화되기는 하겠지만 4.5% 경제성장을 거둔다니 신통할 정도이다. 수출은 16.1% 증가에서 8% 증가로, 설비투자는 24.3% 증가에서 6.5% 증가로 대폭 둔화되겠지만 건설투자가 -1.5%에서 2.5%로, 그리고 민간소비는 4.2%에서 4.5%로 성장을 이끌 것이란다. 바야흐로 내수가 성장을 이끌 것이라는 말이다. 한술 더 떠서 대통령은 작년의 예측이 실적을 밑돌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년에도 5% 이상의 성장을 자신했다. 정부 역시 예산안을 편성할 때 내년 성장률을 5%로 상정했다.

나는 한은을 신뢰하며 그 전망이 맞기를 바란다. 그러나 금년 만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요소가 몇군데 발견된다. 한은 전망은 중국의 경제성장율을 9% 내외로 전제하고 있는데 중국 정부는 성장 목표치를 8%로 잡았다. 부동산 버블 등 내수 과열의 양상을 보이는 상황에서 투자 증가율에 손을 대겠다는 얘기다. 우리 수출의 25%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의 성장은 근년의 우리 성장률을 좌지우지한다.

한은의 이번 발표에는 이례적으로 연간 평균 환율 가정이 빠져 있다. 최근 OECD는 2007년을 100으로 삼을 경우 한국의 명목 실효 환율지수가 주요국 가운데 가장 낮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한국에 대한 절상압력이 거세리라는 걸 의미한다.

산업별로 봐도 한국의 수출증가를 이끌었던 자동차 산업의 경우 28% 수출 증가에서 5.8% 증가로 대폭 위축될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세계 반도체 시장도 금년 32.5% 증가에서 5% 증가로 주춤할 것으로 보여 작년에 60~70%나 증가했던 한국 반도체 판매도 당연히 위축될 것이다. 최근 D램 가격이 7개월 연속 하락하고 있는 것도 역시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결국 내년 수출은 한은 전망보다 더 낮을 가능성이 높다. 세계경제 곳곳에 잠재되어 있는 폭탄이 터지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도 그렇다는 얘기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4월 5일 은평뉴타운 현장을 찾아 둘러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렇다면 건설투자와 소비가 내년 성장을 이끌어갈 수 있을까? 준공 후 미분양만 5만호 가량, 그리고 전체 미분양이 약 8만호 존재하는 가운데 건설투자가 획기적으로 증가한다는 건 뭘 의미할까? 집값 하락 가능성 때문에 전세 가격은 치솟고 사교육비와 의료비가 여전히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데 민간 소비가 과연 금년 수준을 넘어설 수 있을까?

한은 홈페이지를 보면 스스로의 설립 목표가 “물가를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한은은 이번 발표에서 “금년 4/4분기 이후 중기물가안정목표 중심치(3.0%)를 상회하는 3%대 중반의 소비자 물가 오름세가 상당기간 지속될 전망”이라고 남의 일처럼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왜 한은은 성장률 전망치를 가능한 한 끌어 올리고 자신의 존재 이유인 물가 상승에는 달관한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물가를 잡을 방법이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양적 완화, 즉 통화증발이 대표하듯 각국에서 지난 2년 동안 풀린 돈이 아시아로 몰려 들고 있다. 한국의 증시가 최고치를 갱신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원화는 절상 압력을 받게 된다.

또 모두 원화절상을 예상한다면 국내 금융기관은 달러를 보유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정부는 달러를 계속 사들여서 외환보유고를 늘릴 수 밖에 없다. 정확히 매키넌이 이름붙인 ‘미성숙 채권국’의 문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상황은 투기공격을 유발하며 장차 외환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다. 정부가 선물환 포지션 한도 설정, 외국인 채권투자 과세환원 조치, 전성 부담금 정책을 연이어 발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경향신문 12월24일 정태인 칼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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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하효과는 거짓, 부자감세 철회를

한은이 물가와 자산 버블을 걱정한다면 통안증권 등을 팔아 달러와 교환된 원화를 걷어 들여야 한다(불태화 정책). 그러나 수출과 환율이 더 우선이라면 통화량 증가를 방치하게 될 것이다. 왜 한은이 물가 상승에 무덤덤하고 대통령은 고성장을 자신하는가? 한마디로 넘쳐나는 돈을 방치해서 자산거품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원화절상을 최대한 막아서 수출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또 하나, 내년 정부 예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역시 토목 건설에 대한 의존이다. 2009년에 30.1% 증가해서 25.5조원에 달한 SOC 예산은 금년에 25.1조원, 내년에 24.3조원으로 계속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4대강 예산은 수자원공사 지출까지 포함하면 9.6조원으로 금년에 비해서도 16.8%가 증가했다. 날치기 통과까지 하면서 4대강 예산을 지키는 것이 이명박 정부에게는 절박한 일이었던 셈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우리도 복지국가”라며 증거로 든 복지예산은 어떨까? 2005년에서 08년까지 매년 11.3% 증가하던 복지예산은 2009년 위기 때 18.8% 증가했지만 금년에는 1.0%로 대폭 증가율이 낮아졌고 내년에는 6.2% 증가한다. 그러나 공적 연금 자연증가분 등 의무지출과 주택부문 증가가 내년 예산 증가분의 대부분을 차지해서 실질적인 정책 증가분은 사실상 없는 상태다.

물론 이렇게 예산이 빠듯해진 것은 2008년의 영구적 ‘부자감세’ 때문이다. 그 때문에 작년의 50조원 적자, 금년의 30조원 적자에 이어 내년에도 25,3조원의 적자를 본다. 정부가 전제로 한 5% 경제성장을 했을 때 그렇다는 얘기이며 우리의 예상대로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고 심지어 세계가 더블딥 상황에 빠진다면 적자 문제만으로도 우리는 심각한 지경에 빠질 수 있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오른쪽)가 12월 20일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사회보장기본법 전부 개정을 위한 공청회에 
                        참석한 안상수 대표에게 관련 자료를 보여주며 얘기를 하고 있다. |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즉 정부의 정책이 예상대로 실행된다 해도 우리는 거품과 적자 더미에 빠지게 된다. 시장 임금과 복지가 정체된 상태에서 물가와 자산가격이 오른다면 양극화는 극으로 치달을 것이다. 내년 초에 한·미 FTA까지 통과시킨다면 우리는 돌아갈 길조차 잃게 된다. 이미 우리나라가 복지국가라든가, 복지는 낭비(윤증현)라는 시대착오가 반영구적 정책기조가 되는 것이다. 박근혜씨가 “아버지의 궁극적 소원”인 복지국가를 진정으로 이루려면 한·미 FTA 반대의 맨 앞에 서야 한다.

대침체기의 정책은 오히려 간단하다. 경제성장이 되면 물이 위에서 흘러 내릴 것이라는, 이른바 적하효과(trickle down effect)는 이미 거짓으로 판명났다. 아무리 수출을 해도 ‘고용없는 성장’일 뿐이고 돈을 아무리 풀어도 ‘유동성함정’에 빠져 금융기관과 자산시장 안에서만 돈이 돌기 때문이다.

물은 밑에서부터 차오른다. 마찬가지로 돈이 밑으로 돌아가면 국내에서 소비되고 자영업자와 내수 중소기업이 살아날 수 있다. 부자감세를 철회해서 그 돈을 서민복지에 사용해야 한다. 특히 교육과 의료에 대한 투자는 장기적으로 가장 효율성이 높은 것으로 이미 판명났다.

이 정부가 부추기고 있는 사교육과 민간보험이 아니라 공교육과 건강보험이 우리를 구원할 튼튼한 동아줄인 것이다. 거품을 키우는 정책이 아니라 거품을 빼는 정책이야말로 우리의 집과 일자리를 보장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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