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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연세대교수·사회학


한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 21세기 첫 번째 10년을 말한다. 누구는 2000년부터 새 시대를 얘기하지만, 새로운 세기의 출발이 2001년부터라면 바로 오늘이 21세기 첫 번째 10년을 마감하는 날이다.

세계사적으로 지난 10년은 신자유주의의 종언을 알리는 시대로 기록될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와 피로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 신자유주의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결정적 위기를 맞이했다. 1950~70년대 ‘진보의 시대’에 뒤이어 1980년대에 등장한 ‘보수의 시대’가 신자유주의의 위기와 더불어 새로운 전환점에 위태롭게 서 있다.


‘포스트 신자유주의’ 불안한 전환점

문제는 이 ‘포스트(post) 신자유주의’ 국면이 상당히 불분명하다는 데 있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국면 교체가 막 시작됐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를 고수하려는 세력과 넘어서려는 세력 간의 경쟁 및 갈등이 치열하다. 이른바 ‘파국적 균형’이 진행되고 있다.

둘째,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발전패러다임이 명확하지 않다. 패러다임 교체의 최후 승인이 국민적 집합의지에 달려 있다면, 국민적 관점에서 대안 패러다임은 여전히 모호하다.


최근 미국과 일본의 사례는 이러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미국의 경우 의료개혁을 성취했으나 신자유주의의 중핵을 이루는 금융부문 개혁은 지체돼 있다. 일본의 경우는 아동수당은 지급했으나 국가 재정이 상당한 위험을 노정하고 있다. 유럽의 경우도 큰 차이가 없다. 지난해와 올해 독일과 스웨덴의 선거에서 보수 세력이 선전했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뚜렷한 대안을 제시해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은 것은 아니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국면사적 시각에서 신자유주의에서 포스트 신자유주의로의 변화가 더디게 진행되고 있으며, 국가마다 그 변동은 상이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이 왼쪽으로 이동해 왔다면, 유럽은 오른쪽으로 이동해 온 것이 포스트 신자유주의 국면의 정치적 풍경이다.

둘째, 이러한 지구적 변화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다. 돌아보면, 우리 사회에서 국면적 전환을 강제한 것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였지만, 올해 무상급식을 둘러싼 토론과 그 연장으로서의 6·2 지방선거 결과는 포스트 신자유주의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한 상징적 징표다.

                                                          부와 빈곤이 교차하는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마을 너머로 솟아있는 타워팰리스가 구룡마을 판자촌과 대조를 이룬다.<권호욱 기자>


평화·민주·생활 ‘3대 위기 극복’ 숙제로

다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2011년 새롭게 열릴 우리 사회의 정치구도는 포스트 신자유주의 국면이라는 ‘구조적 강제’와 정치사회 및 시민사회의 ‘경로의존성’ 속에 조건지어져 있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정치의 양대 과제는 국가비전의 제시와 사회갈등의 조정이다.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사회 양극화를 어떻게 해소하고 인간성의 파괴를 어떻게 복원할 것이며, 이를 거시적 국가비전과 미시적 정책대안으로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에 정치 본연의 역할이 놓여 있다.

바로 이점에서 2011년에는 우리 사회 미래에 대한 일대 논쟁이 펼쳐질 것이다. 2012년에 총선과 대선이 동시에 치러지는 만큼, 이른바 ‘중대 선거’(critical election) 국면이 일찍 열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진보개혁 세력이다. 진보개혁의 관점에서 현재 우리 사회는 평화의 위기, 민주의 위기, 생활의 위기라는 ‘3중 위기’에 직면해 있다. 당장 올해만 돌아봐도 연평도 포격으로 상징되는 한반도 평화공존의 위기, 민간인 사찰로 상징되는 민주주의 후퇴의 위기, 양극화 심화로 상징되는 서민과 중산층 경제생활의 위기야말로 우리 사회의 우울하고 참담한 현주소다. 위기는 불안을 낳고, 그 불안이 다시 위기를 강화하는 악순환 속에 다수의 국민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갈 길 몰라 서성거리고 있다.

진보개혁 세력에게는 두 가지 과제가 주어져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먼저, 신자유주의적 개발주의에 맞서는 새로운 비전과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포스트 신자유주의 아래서 어떻게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국가비전과 정책대안 제시다. 괜찮은 일자리를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 복지 재원 확보를 위해 증세를 할 것인가, 아동수당 등 보편적 복지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어떤 대외정책을 추진할 것인가 등에 대해 진보개혁 세력 내에서, 나아가 보수 세력과의 치열한 미래 논쟁을 벌여야 한다.


이러한 논쟁 가운데 복지국가를 둘러싼 토론은 그 중핵을 이룰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새삼 복지국가가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모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양극화가 강화되면서 사회적 약자들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증가돼 왔다.
둘째, 특히 올해 무상급식을 둘러싼 토론은 복지의 중요성을 환기시켰다. 산업화 시대의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의식에서 세계화 시대의 ‘국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의 문제의식에로의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목할 것은 복지에 대한 이러한 높은 관심이 보수와 진보 모두에서 이미 찾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한나라당의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인 박근혜 의원은 ‘한국형 복지’를 제시하고 있으며, 이에 맞서는 야권의 주요 후보들 역시 ‘보편적 복지’, ‘역동적 복지국가’, ‘사회투자국가’ 등 다양한 담론들을 펼쳐 보이고 있다. 바야흐로 복지담론의 르네상스가 열리고 있다.

복지국가의 지구적 경향을 지켜볼 때 진보개혁 세력은 한국 사회의 역사적, 구조적 조건 아래 복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을 모색해야 한다. 사회복지는 ‘경제적 교환’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교환’, 다시 말해 정치세력 간의 ‘역사적 타협’이다.

이러한 타협에서 사회적 약자를 체계적이고 장기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정책적 선택을 진보개혁 세력은 추진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 과제가 중요하다.

첫째, 경제의 지속가능성과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재정 건전성이 경제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불가피하다면, 복지 강화는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기본 조건이다. 따라서 재정 건전성의 확보를 위한 증세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이를 설득할 필요가 있다.
둘째, ‘전통적 복지국가’ 구축과 ‘적극적 복지국가’ 모색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세계화의 진전과 정보사회의 강화라는 외적 조건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생산적이고 복합적인 정책대안들을 강구해야 한다.

한편, 비전 제시와 더불어 정치의 시민주체성 또한 회복해야 한다. 지난 2002년 대선, 2004년 총선, 그리고 6·2 지방선거에서 볼 수 있듯이 시민주체성이 온전히 발휘될 때 진보개혁 정치가 주목할 성과를 이뤘음을 기억해야 한다. 진보개혁의 관점에서 오늘날 그 어떤 정치적 기획도 참여민주주의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다. 민주대연합이든 진보대연합이든 새로운 정치 모델의 구성은 무엇보다 시민주체성의 열망을 구체화해야 한다.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8월 13일 저녁 서울 정동 서울지방국토관리청 앞에서
                                                ‘4대강 사업 중단 촉구’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정지윤기자>



돌아보면, 우리 사회에서 위기에 빠진 진보개혁 정치에 새로운 힘을 불어 넣은 것은 2008년 촛불집회였다. 보수적 권위주의 정치, 신자유주의 경제경책, 그리고 생명부정의 반인간주의에 의연히 맞서고자 했던 것이 촛불의 정신이었다면, 주인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않는 오만한 대리인을 책망하고 바로 잡으려는, 직접행동의 시민불복종, 시민행동의 참여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 촛불의 방법론이었다.

진보개혁 정치가 국민다수로부터의 지지를 다시 획득하기 위해서는 바로 촛불집회에 담긴 시민주체성의 열망을 반영할 수 있는 절차와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대중의 정치적 자발성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정당조직 내부 개혁, 공직 후보 선출방식 개발, 그리고 정당-시민사회 간의 네트워크 및 거버넌스 활성화 등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대의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 간 쌍방향의 이른바 ‘이중적 토론정치’를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가에 진보개혁 정치의 미래가 달려 있다.

우리 사회는, 우리 정치는 이제 새로운 미래 논쟁을 기다리고 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기대로, 불안을 희망으로 변화시킬 21세기 두 번째 10년의 첫 해를 열어야 한다. 오늘밤이면 제야의 종소리가 전국에 울려 퍼진다. 오래전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느니라.’ 자, 이제 새로운 시작이다. 종이여 울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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