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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중항쟁 기념일이 되면 민주화 세대들은 자신의 자녀나 학생들에게 광주항쟁의 의미를 전하려고 노력한다. 동영상이나 그때의 사진을 보여주기도 하고 직접 광주 망월동에 데리고 가기도 한다. 그 끔찍한 장면들을 보면 마음이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광주가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말해주며 그 의미를 ‘자연스럽게’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많은 경우 후대들의 반응은 신통찮다. 건성건성 듣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런 말이 절로 나온다. “너희가 누리는 이 자유와 민주주의가 누구 덕분인 줄 아느냐?”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이 한 청년을 어디론가 끌고 가고 있다. (경향DB)


‘덕분’을 강조하는 말은 듣는 사람에게 부채의식을 갖게 한다.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빚을 갚아야 한다. 빚을 진 사람은 그 빚을 갚을 때까지는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인류학의 성과들은 인간 사회란 이렇게 빚을 지고 빚을 갚는 과정에서 지속된다고 말한다. 누구도 누구에게 빚을 지지 않는 사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결속할 수 있는 계기를 잃어버린 사회다. 그렇기 때문에 ‘덕분’을 강조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덕분’으로 얽혀 있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증조’ 할아버지 세대는 우리가 폭탄을 맞으면서 이 나라를 세우고 지켰다고 말하고, 그 다음 할아버지 세대는 자신들이 피땀 흘려 산업화를 했다고 말한다. 부모 세대는 지금 민주화가 자신들의 덕분이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가장 사이가 나쁠 것 같은 할아버지 세대와 부모 세대는 ‘차라리’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화해하고 대화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좀처럼 서로의 덕분을 인정하지 않고 이들 두 세대가 팽팽하게 대립하지만 서로의 ‘덕분’을 인정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다음 세대와의 관계다. 유독 다음 세대는 빚을 갚고 앞선 세대를 덕분으로 엮을 가능성마저 부정당하고 있다. 특히 민주화를 자신들이 이루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후대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렇다. 이들은 지금도 그렇고 미래에도 자신들이 후대의 어떤 ‘덕분’에 빚지며 살아갈 것이라고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을 때까지 후대가 자신들에게 신세를 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걸 못 만들어주는 것을 ‘미안’해하면 했지 후대가 스스로 알아서 살아가며 민주화 세대의 미래까지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빚만 강조되고 ‘덕분’의 상호성은 파괴되어 있다.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가 쓴 대자보 (경향DB)


이들이 후대에게 바라는 것은 자신들이 아직 끝내지 못한 것(정치적으로는 ‘민주화’일 것이고 실생활에서는 지금의 부를 재생산하는 것)을 이어가는 정도다. 그래서 이들은 후대들이 자신들처럼 말하고 생각하기를 바란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학교 대자보나 투쟁 현장의 말은 20~30년 전과 다르지 않다. 이와는 반대로 민주화 세대의 손길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운동을 일구어온 청소년 운동 활동가들이 투쟁 현장에서 자신만의 방식대로 말했을 때 윗세대들이 보이는 반응이 정반대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작 후대들이 자신들의 삶, 즉 자신들의 투쟁 현장에서 만들어 내는 말을 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들의 말만이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는 오만함이며 말에 대한 독점이다.


이렇게 ‘덕분’의 상호성과 말의 평등함이 파괴되면 관계는 ‘적대화’되어 파산하고 만다. 한쪽은 우리 ‘덕분’이라고 할 말이 줄줄이 있는데 다른 한쪽은 우리 덕분이라고 말할 가능성마저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능성에 대한 부정과 말의 독점이야말로 그들을 ‘다른 말’로 밀어낸다. 나는 몇몇 인터넷 사이트의 선정적인 말하기 방식만큼이나(혹은 그 때문에라도) 민주화 세대의 말걸기 방식이 우려스럽다. 단지 ‘꼰대짓’이기 때문이 아니다. 왜 ‘민주화’의 언어가 후대들 사이에서 고립되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할 때다.




엄기호 |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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