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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밥과 먼지, 소음이 가득하고. ‘햇빛을 잘 못 보는’ 공장.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름 대신 “1번 시다” “5번 미싱사” 등으로 불렸다. 어리게는 12살부터 시작하는 시다들과 19살부터 시작하는 미싱사들은 하루 14시간을 일을 하고 한 달에 두 번 쉬었다. 그러고도 점심 도시락을 싸오거나 사먹기가 어려웠다. 일하다가 병을 얻으면 치료가 아니라 해고를 당했다. 1960~1970년대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걸 알고는 근로조건을 개선할 수 있겠다 여겼던 한 청년은 갖은 노력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그 법은 아무 쓸모가 없음을 깨닫는다. 끝내 근로기준법 책을 껴안고 자신에게 불을 붙였다. 그가 간 11월도 아니건만 어울리지 않게 나는 ‘전태일’을 떠올린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지난 10일, ‘전태일재단’ 사람들이 대구광역시를 찾았다. 중구 계산동 주교좌 대성당 앞에 내려 길을 걷는데, 여기저기 사진기를 어깨에 메거나 손에 든 사람들이 많았다. 가까이 있는 ‘이상화 고택’을 찾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라고 노래한, 시인 이상화가 살던 집을 둘러보면서 누군가는 오래도록 잊었던 시인의 이름을 떠올리고, 시 한 구절을 읽어보고, 노래 한 자락을 속으로 읊조릴 것이다. 처음 만나는 이도 있을 테고.


찾아가고 기억하고 살리기, 흔적을 더듬어야 할 사람이 있어 대구에 온 이들은 먼저 동산동으로 향했다. 건널목 저편에 ‘바르게 살자’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새겨진 커다란 바윗돌이 놓인 작은 공원을 시작으로 리어카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만큼의 폭을 지닌 남산동 골목과 인쇄골목을 빠져나와 수업이 끝난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명덕초등학교, 35년 전 이사든 집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둔 어느 집…. 오후 내내 걷다 멈추다 찾다 확인하다 기억하며 걸었다. 발길은 대구를 떠나 부산 영도와 부산진역까지 이어졌다. 전태일이 태어나고 자라고 살았던 가난한 집들과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 헤맸던 그 길들이다. 


일을 마치고 저녁 6시부터 9시까지 3시간 정도 배우고 익히며 친구들과 어울렸던 청옥고등공민학교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던 전태일. 학교가 있었던 명덕초등학교 교정에서 전태일이 일기에 썼던 선생님 한 분을 만났다. 서울에서 재단사로 일하면서도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던 기억 속 제자는 “한마디로 바르게 사는 전태일”이었다. 그 말을 전하는 목소리가 뜸들임 없이 단호했다.


전태일이 불길에 휩싸인 채 외쳤던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는 구호는 43년을 지나는 이제는 필요치 않은, 완성된 혹은 낡은 구호일까. 


전태일 영정 (경향DB)


당시 ‘대통령 각하’에게 진정하는 편지를 썼던 전태일은 그 편지를 부치지 않았다. 이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을 거라고 한다. 뻔히 알았을 노동자의 고통을 외면했던 각하처럼 오늘 각하는, 고통의 최첨단에 있는 이들을 돌아보지 않는다. 


사람의 목숨을 귀히 여기지 않는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산업재해로 일터에서 목숨을 잃거나 위협을 당하고, 종탑과 철탑이라는 고공농성장에서 땅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권리를 주장하는 거리에서 경찰의 폭력에 휘둘린다. 고통은 노동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곳곳 삶터가 지금 비상이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적인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했던 전태일. 오래 노동자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그날 전태일을 좇아 길을 더듬었던 건, 오늘 누구와 함께 어떤 길을 밝히고 싶어서였을까.



박수정 |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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