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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의 횡포에 맞서 정치권 모두가 “을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다. 새누리당이나 민주당 모두 권력만 잡으면 ‘갑’들을 대변해온 터라 진정성에는 의심이 가나, 억울함을 하소연할 곳도 없던 ‘을’들에겐 공간이 열렸다.
수십년 억눌려온 택배기사들이 CJ대한통운의 일방적 수수료 삭감과 페널티 제도에 분노해 파업에 나서는 등, 부당한 ‘갑질’에 맞서 직접 행동으로 나서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 현상이다. 바로 그 시점에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갑들이 동행했다. 각각 불법파견과 불산 누출로 하청노동자들에게 제대로 ‘갑질’을 하고 계신 현대차 정몽구, 삼성전자 이건희 등 재벌 회장들이 역대 최다로 참여한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지난 8일 한국과 미국 최대의 갑들이 모인 ‘한·미 CEO 라운드’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대니얼 애커슨 GM 회장에게 “통상임금 문제를 꼭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해주고 말았다.
미 상공회의소 CEO라운드테이블 오찬
(경향DB)
GM이 어떤 회사인가. 전 세계 대륙에 생산공장을 지어놓고 “보조금과 혜택을 주지 않으면 공장을 철수할 수도 있다”며 각국 정부를 상대로 갑질을 해대는 ‘글로벌 갑’ 아닌가. 이를테면 지난 2년간 GM이 호주에서 벌인 일을 살펴보자. 재작년에 GM은 정부 지원금이 없으면 소형차 크루즈 생산공장을 옮기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결국 지난해 호주 연방정부와 지방정부는 향후 10년간 무려 10억달러(약 1조1000억원)를 GM에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2억7500만달러(약 3000억원)를 먼저 지급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을까? GM 호주법인은 지난해 2월 150명, 11월에는 170명의 노동자를 정리해고·희망퇴직으로 쫓아낸 데 이어, 올해 4월에는 500명의 구조조정을 발표했다. 뇌물 주고 뺨 맞은 격이랄까? 한때 2700명이 일하던 GM 호주 공장에는 이제 1600명 남짓의 노동자들만 남게 된다. 앞으로도 8000억원을 더 퍼줘야 하니 ‘호주’가 아니라 ‘호구’ 정부란 말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런 GM 회장의 말 한마디에 맞장구를 쳐준 것이다. 게다가 대통령 스스로 GM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언급했으니, 동석했던 한국의 재벌 ‘갑’들 역시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GM의 역사 및 구조조정 일지 (경향D B)
그런데 GM의 글로벌 갑질에 대한 분노는 남양유업이나 CJ대한통운에 대한 그것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통상임금 소송 당사자 대부분이 현대·기아차나 한국지엠 등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어서, 대리점주나 택배기사들처럼 ‘억눌려온 을’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송을 하려면 ‘정기 상여금’을 받는 노동자여야 한다. 최저임금 언저리에 있는 수백만 저임금 노동자들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
물론 대기업 정기 상여금은 턱없이 낮은 기본급에 대한 보전 성격이 강하다. 현대차 정규직 신입사원 시급은 5566원으로 법정 최저시급(4860원)보다 고작 706원 높다. 연봉에서 기본급 비중은 30% 남짓으로, 하루 8시간 노동으로는 현재 임금의 3분의 1도 받지 못한다. 하지만 결국 저임금 노동자들과의 격차가 더 벌어지는데 ‘통상임금에 대한 법적 권리’만 주장한다면 광범위한 ‘을’로부터 지지받을 수 있을까?
박근혜 정부도 바보가 아닌 이상 통상임금만이 아니라 임금체계 전반을 건드리려 할 것이다. 노사정위원회 역시 오래전부터 임금체계 전면 개편을 의제로 올려놓았다. 이들 ‘갑’에 제대로 맞서려면 더 넓은 ‘을의 연대’를 짜는 것이 현명하다.
“소송에서 이기면 그동안 못 받은 체불임금 절반을 저임금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 후원기금으로 내놓는 운동을 벌이자.” “지금부터 매달 1만원씩 걷어서 법정 최저시급을 1만원으로 올리자는 알바연대에 투쟁기금으로 지원하자.” “상여금과 잔업·특근이 아니라 최저임금과 기본급을 대폭 올려 기형적 임금체계를 바꾸자.” 이게 바로 저임금 노동자 처지를 개선하면서도 대기업 정규직의 권리를 보장받는 영리한 방법이 아닐까?
오민규 | 비정규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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