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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있는 정 과장의 눈앞에 개인물품을 담을 누런 박스 하나가 놓여 있다. 동료들은 애써 외면하고 직속상관인 유 부장은 이 모든 상황을 미리 알고 자리를 뜬 상태였다. MBC <무한도전> ‘정리해고’ 편에 나온 장면의 일부다. 노동절을 앞둔 시기에 정리해고라는 주제를, 그것도 주말 오락 프로그램에서 다뤘기에 유심히 봤다. 연출자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정리해고는 50일 전 당사자에게 통보해야 하고, 해고 회피 노력과 대상자 선정의 객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영상의 긴박한 이유가 있어야 정리해고를 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이 프로그램에는 빠져 있다. 그러나 오락 프로그램에서 그것까지 기대하는 건 무리인 듯하다. 그래서 정리해고의 절차나 과정이 아닌 연출자의 메시지가 더욱 궁금했다.


극중 정준하씨가 맡은 정 과장은 눈치가 없고 상사에게 기거나 아부할 줄 모른다. 그러다보니 ‘비비는 문화’에 익숙한 회사 생활에서 번번이 ‘물’을 먹고, 심지어 상사와의 윷놀이에서도 은근슬쩍 져주는 눈치조차 없다. 이런 성격 탓에 정리해고 대상자가 된 것일까? 해고 이유는 해고된 이후에 더 잘 설명되고 있다. 해고를 당하고도 정 과장은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고 현실로 해고를 받아들인다. 어쩌면 정 과장을 해고한 이유는 그가 저항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저항은 결과뿐 아니라 과정에서 배우고 축적하는 경험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한 것은 아닐까. 무한상사라는 가공현실에 정 과장이 있다면 현실엔 박 대리가 있다.


MBC <무한도전> ‘무한상사’ 편


얼마 전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안철수 후보의 출마로 유명해진 서울 노원병 지역구는 노회찬 전 의원이 삼성 X파일 사건으로 의원직을 잃은 곳이다. 그에게 적용된 ‘통신비밀보호법’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 사건은 삼성의 힘과 지배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삼성엔 국회의원 한두 명쯤 그만두게 하는 것은 일도 아닌 것 같다. 이런 회사에 맞서 무노조 경영 방침을 어기고 노조를 만들려 했다는 이유로 23년을 일하다 해고된 이후 지금까지 투쟁하는 사람이 있다. 삼성 해고자 박종태 대리 얘기다. 해고되던 날, 현장 냉장고 안에 있는 자신의 약봉지를 가져가게 해달라는 박 대리의 간곡한 요청에 회사는 현장 동료들과의 만남을 막으려고 1t이 넘는 냉장고를 직원을 시켜 들고 오게 했다. 그리고 박 대리 앞에 냉장고 안의 물건들을 내팽개쳤다. 이뿐만이 아니다. 빈 책상 앞에 하루 종일 앉아 있게 하는 ‘면벽 고문’을 자행하고 동료들과의 대화는 물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결국 박 대리는 정신과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했는데 슬프게도 23년을 다닌 회사보다 병원이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줬다고 한다.


만약 박 대리가 부당한 회사 지시에 군소리 없이 따랐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적어도 박 대리는 지금쯤 박 과장이 됐을 테지만, 그것도 잠시뿐 이내 정 과장의 신세로 바뀌었을 것이다. 저항할 힘과 의지와 경험이 거세된 박 과장으로 말이다. 자본은 경영상의 이유를 들어 정리해고자와 비정규직을 늘리고 있지만 10대 재벌의 사내 보유금이 사상 최대란 점을 감안하면 이는 설득력을 잃는다. 정 과장이 해고된 이후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성격 탓이 아니라 저항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 차원의 화풀이로는 구조와 제도로 덤벼드는 자본에 맞설 수 없다. 정 과장은 이런 현실을 알지 못했고 이를 체념해 버렸다. 연출자가 예능에서 이런 문제를 다룰 수 있었던 것도 실은 그의 노조활동 및 파업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박 대리가 자신의 저항 경험을 담은 책을 냈다. 제목이 역설적이게도 <환상>이다. 박 대리의 저항은 어쩌면 수많은 정 과장들에겐 그저 환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박 대리는 현실에서 이 환상을 실현했다. 그는 정작 정 과장들이 깨야 할 환상은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재벌의 슬로건임을 일깨운다. 어떤 환상은 끝내 깨지고, 어떤 환상은 결국 이루어질 것이다. 그건 수많은 박 대리들과 정 과장들의 분노가 조직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이창근 | 쌍용차 해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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