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희망이라는 단어가 점점 낯설어지는 나날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데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를 보면서, 또 그런 정부를 제대로 견제하지도 바꿔내지도 못하는 정당들을 보면서. 이 나라의 정치를 보고 있노라면 희망이라는 말은 마치 외계어 같다. 유가족을 꼬옥 껴안고 함께 눈물 흘리며 아픔을 나누지도 못할 정도로 망가져버린 정치이다.
이번 스승의날, 필자의 수업을 들었던 한 학생에게서 편지가 왔다.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그 힘겨움의 한복판에 비관과 회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편지에는 좋은 일만 적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렇질 못해서 안타깝습니다. 끝이 있긴 할지, 이 사회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부분이 과연 존재할지… 언론부터 시작해서 정경유착과 관료제 게다가 종교, 개개인의 도덕성과 책임감까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문제인지, 바뀌긴 할지 무섭습니다. 정권퇴진을 외치지만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을 텐데… 자꾸만 비관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회의만 듭니다. 사람을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버리는 이 국가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지, 옳고 그름 따위는 무시하고 눈앞의 이익과 개인의 안정만을 위해 굴러가는 사회가 유지될 가치가 있는지….”
못다한 말이 많은데 (출처 :경향DB)
그의 비관과 회의는 정치를 훌쩍 넘어 대한민국 전체를 향해 있다. 정권의 퇴진이 아니라, 국가의 존재와 사회의 유지에 대해 ‘이유 없다’고 판결할지 아닐지를 고민하고 있다. 그 고민 속에 대한민국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없었다.
편지를 받고 나흘이 지난 5월19일,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했다. 박 대통령은 대형참사를 막지 못한 과오에 대해 눈물까지 흘리며 국민들에게 사과했다. 해경을 해체하고 안전행정부와 해양수산부를 축소하고 국가안전처를 신설하겠다며 정부조직 개편안을 제시했다. 민관유착의 고리를 끊고 관피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직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겠다고 했다. 업체의 비정상적 사익추구도 엄벌하겠다고 했다. 민간이 참여하는 진상조사위원회의 구성도 약속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고,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구조를 위해 달려왔던 어업인들과 민간 잠수사들, 친구와 학생들과 승객들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학생들과 선생님들과 선원들을 영웅이라 칭했다. 그들에게서 대한민국의 희망을 본다고 했다.
희망! 대통령이 이제는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았던 대한민국의 희망을 이야기했다. 학생이 보낸 편지의 끝자락에도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서로를 격려하고 챙기며 그 안에서 끝까지 믿고 기다린 아이들과 그들을 구하기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도망치고 싶다가도 다시 희망을 갖게 됩니다”라고. 대통령이 그의 편지를 훔쳐본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사실은 누구나 이미 알고 있는 ‘희망의 원리’를 단지 기억해낸 것이리라.
그 학생은 어땠을까. 대통령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희망의 원리를 잘 알고 있다며 안도감을 느끼고 국가와 사회의 필요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을까? 직접 물어보자. “소희야,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어땠니, 괜찮았니?” “나는 어땠냐고? 선생님은 우선 너도 그렇고 대통령에게도 고마웠어. 희망이란 말을 다시 들려줘서, 그리고 희망의 원리를 상기시켜줘서. 하지만 금세 공허해졌단다. 왜냐고? ‘안전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해놓고선 중동으로 원전 세일즈한다며 후다닥 떠나는 것을 보면서 그랬지. 문제 많다는 원전을 수출까지… 중동은 위험해져도 된다는 건가. 대통령은 희망의 원리를 공허하게 만드는 법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너도 그런 것 같다고?”
김윤철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시사평론가
'일반 칼럼 > 세상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읽기]사치품과 명품 (0) | 2014.06.09 |
---|---|
[세상읽기]환멸에 종지부를 찍자 (0) | 2014.05.26 |
[세상읽기]노동자가 역사를 새로 쓰자 (0) | 2014.05.19 |
[세상읽기]나만 아니면 돼 (0) | 2014.05.12 |
[세상읽기]그들의 세계관 (0) | 2014.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