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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재난 영화를 많이 봤기 때문일까? 헬리콥터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와 승객들의 몸을 묶어 끌어 올리는 특수 요원들을 상상했다. 여분의 산소통을 메고 뒤집힌 배 안으로 헤엄쳐 들어가 아이들의 입에 호흡기를 대 주는 특수 요원들도 상상했다. 이 나라에도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영웅들이 적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TV 화면을 통해 보는 현실은 상상과 너무 달랐다. 선장과 선원들을 먼저 구조하고 바다에 빠진 사람들만 건진 채 물러나는 구조선, 침몰해 가는 배 위를 몇 차례 선회하다 사라지는 헬리콥터, 숱한 재난 영화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던졌던 메시지들, 인류애적 희생과 헌신, 숭고한 도덕성 같은 것들은 볼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차가운 바다, 차가운 정부, 차가운 사람들이었다. 생명에 대한 사랑이, 생명에 대한 예의가, 생명에 대한 절실함이 보이지 않았다.

선장과 함께 탈출한 선박직 승무원 중 단 한 사람도, 객실로 뛰어가 사람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해경 구조대원들도 목숨을 걸고 사람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친구에게 구명동의를 양보하고 다른 친구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정차웅군, 마지막 순간까지 승객들의 탈출을 도왔던 사무장 양대홍씨와 비정규 승무원 박지영씨, 제자들과 운명을 함께한 남윤철·최혜정 교사 등 배 안에서 영웅적 인간애를 발휘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 자리에서 국가를 대표했던 사람들은 흡사 위험을 감지하면 움직이지 않는 센서 달린 기계처럼 행동했다.

물론 누구도 남에게 제 목숨 던져 다른 사람을 구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국 9·11 테러 때 사람들을 구하러 무너져 가는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은 소방관은 343명이었다. 해경 구조선이 선장을 ‘구조’한 시각은 오전 9시46분, 배 안에 있던 아이들은 오전 10시11분까지도 동영상을 찍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이 25분간, 승객들을 구하러 배 안으로 들어간 정부 소속 구조대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에서 세월호 참사는 세계 재난사에 기록될 만하다.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이 지난달 30일 진도군청에서 열린 범정부사고대책본부 브리핑에서 세월호 침몰사고 피해 가족과 국민들에게 공식 사과하고 있다. _ 연합뉴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본의 이익을 사람의 생명보다 앞세우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지적했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일은 아닌 듯하다. 신자유주의의 성지인 미국에서도 사람들이 이러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또는 그와 더불어 최근 10여년간 한국인들이 일상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익혀 온 ‘재난 대비 매뉴얼’이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실직, 해고 등 ‘사회적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루저’라 부르며 조롱하고, 약자에 대한 연대와 동정을 말하면 ‘종북좌파’라 비난하며,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도우러 달려가면 ‘선동꾼’이라 손가락질하는 극우 담론의 공세에 위축되어 스스로를 검열하는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인간애’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당장 이번 참사를 두고도 “좌파들이 시체팔이에 나설 것”이라느니, “유가족 중에 선동꾼이 있다”느니 하며 인류애에 기반한 보편적 슬픔을 ‘선동의 소재’로만 인식하는 ‘반(反)인간적’ 언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집권여당 국회의원들의 입에서조차. 이런 말이야말로 인류애와 인간다움에 대한 협박이다. 이 협박에 늘 노출되어 움츠린 사람들이 “나만 아니면 돼” “나만 잘 살면 돼”라는 신념을 갖는 건 오히려 정상이다.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이 참사의 의미를 축소하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진 KBS 보도국장을 문책해 달라고 청와대 앞으로 찾아간 날,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긴급 민생대책회의를 열어 “사회불안이나 분열을 야기하는 일들은 국민경제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고 말했다. 유족들에게 ‘국민경제를 생각해서 가만히 있으라’라고 하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했다. 사람을 살리는 게 민생이다. 마지막 순간에 사람을 살리는 건, 사람이지 돈이 아니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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