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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가 가라앉고 나서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겹쳤다. 살아 돌아오지 못한 이들에 대해서는 죄책감이, 책임자에 대해서는 분노가, 그리고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는 연민의 감정이 일었다. 그런데 한 달이 훨씬 지났지만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날이면 날마다 죽은 이들은 모독당하고 산 사람들 역시 조롱당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의 마음은 더 너덜너덜해지고 있다. 이런 큰 사고를 당하고도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회를 보며 사람들은 이곳에서의 삶 자체에 대해 넌덜머리를 내고 있다. 환멸이다.

물론 사람들은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삶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은 걸핏하면 “이민 갈 것”이라고 말했다. GQ라는 잡지에 실린 ‘문득 한국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 대하여’라는 글은 글쓴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공감을 받고 퍼져나갔다고 한다. 한국은 “버티고 버티고 또 버텨야 하는 나라니까, 그래도 뭐가 안 보이는 나라니까”라는 글의 서두에 공감하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처럼 이 사건 이전에 이미 우리는 대부분 지쳐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친 듯이 바쁘게 뛰어다녀도 삶이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아감벤은 아우슈비츠에서의 인간은 인간보다 오래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모든 요소들이 다 발가벗겨진 상태의 ‘인간’이 인간보다 더 오래 산 곳이 아우슈비츠였다는 것이다. 그처럼 소진되기만 할 뿐인 이곳에서의 삶도 삶보다 더 길다. 삶이라는 말이 가진 살과 결은 다 사라지고 오로지 이어지기만 하는 삶을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탄식하지 않았던가. “이게 사는 건가”라고 말이다. 그저 ‘길기만 한’ 삶에 대한 환멸은 이미 목구멍까지 차 있었다.

25일 비바람이 몰아치는 진도 팽목항에 세월호 실종자들을 위해 가족이 차려 놓은 과자와 음료수 등 음식물 위에 빗물이 맺혀 있다. /강윤중 기자


세월호는 이런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알면서도 자기를 기만할 수 있었다. 곧 나아질 것이라고 자기최면을 걸든가 사태가 이 모양인 것은 사회의 탓이 아니라 자기가 노력을 덜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식으로 ‘기만’이 작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호 침몰사고와 그 이후의 수습과정은 이 모든 기만과 위로가 부질없는 것임을 폭로하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사회는 바뀌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이 가망 없는 삶을 이어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 말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길거리로 나간다고 하더라도 그 끝이 어떻게 허망하게 끝날 것인지가 뻔히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삶이 더 환멸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환멸이 체념과 짝을 이루는 이유가 있다. 현재의 삶이 아무리 모욕적이라고 하더라도 오늘을 열심히 살면 내일은 나아질 것이라고 사회가 약속할 때 사람은 오늘을 견뎌내며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희망이란 개인이 멋대로 가지는 헛된 믿음이 아니라 사회가 약속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니 언제 그런 약속을 했느냐며 외려 소리 치고 조롱하는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삶이 어찌 환멸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환멸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는 내일을 약속하는 사회,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책임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첫걸음은 당연히 약속을 지키지 않은 자들에게 철저히 책임을 묻는 것이다. 아직 진상은 드러나지 않았고 제대로 책임진 사람도 없다. ‘잊지 않겠다’는 맹세는 개인적으로 우리끼리 슬퍼하며 기억하겠다는 ‘주문’이 아니다. 그것은 끝까지 책임을 물어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다짐이어야 한다. 기억은 사회 속에 새겨져야 한다. 그것이 환멸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다.


엄기호 |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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