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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생이 전쟁 가능성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 보기에 겁나냐고 물어봤더니 의외로 “나면 나는 거죠”라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 친구 말로는 별로 놀랄 일이 아니고 자기 삶에 큰 변화가 올 것 같지 않아 감흥이 별로 없다고 했다. 전쟁나면 다 죽는데 그게 왜 큰 변화가 아니냐고 하자 “나만 죽는 게 아니라 다 죽는 거라서…”라는 쿨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 학생이 평소에 냉소적인 친구였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수업시간에 발표도 열심히 하고 열정적으로 다른 학생들의 삶에 조언을 하는 친구라서 오히려 내가 놀랐다. 다른 학생들에게도 물어봤더니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심드렁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처음에는 전쟁에 대해 너무 현실감이 없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전쟁에 대한 현실감이 문제가 아니라 현실이 만들어내는 피곤함이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됐다. 얼마 살지도 않았지만 자기들은 놀랄 일이 하도 많아서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는다고 한다. 태어난 지 얼마 후에 IMF 경제위기를 겪었고 초등학교를 다닐 때 9·11테러, 그리고 얼마 후에 동남아를 강타한 지진해일, 이라크 전쟁도 TV 생중계로 봤다고 한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하던 청소년기에는 세계금융위기와 부동산 침체를 겪었고, 또 가장 최근에는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하는 것도 봤다. 그래서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놀라는 일이 생길 때마다 “또 뭔 일이 벌어진 거야?”라며 짜증과 피곤만 밀려온다는 것이다.


이들과 이야기하면서 오래전 아프리카에서 본 ‘놀람이 사라진 사회’를 떠올렸다. 그 나라의 유적지를 가기 위해 우리가 대여한 차를 운전한 기사는 휴게소에서 쉬면서 맥주 1ℓ를 단번에 마시고 다시 차를 몰았다. 도로 군데군데 폭탄이 떨어져 파인 자국이 있었고 차들은 그 구멍을 피해 전속력으로 곡예운전을 했다. 곳곳에서 차들끼리 부딪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가 탄 차도 서너 번 박치기를 할 뻔했다. 다행히 무사하게 돌아온 다음, 우리를 안내했던 그 나라 국립대학 심리학과 교수에게 왜 저렇게 위험하게 운전하는지를 물어봤다. 그러자 그는 웃으며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죽음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죽음에 둔감하다는 것이다. 보통 한 가족의 형제자매 중에서 한둘은 어려서 질병으로 죽는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 중에서 청년기에 내전으로 죽은 사람이 또 한둘이다. 그렇게 죽음이 일상화되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놀라지 않는다고 했다.


피곤한 출근길 (경향DB)


이 정도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도 위기와 위험이 만성화되고 항구적인 것이 되면서 ‘놀람’은 사라졌다.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 중의 하나가 “놀랄 일은 아니다”이다. 정권에서 엄청난 비리가 터져도 놀랄 일이 아니고, 상상하기 힘든 성추행 사건이 벌어져도 놀랄 일이 아니고, 유명인이 자살해도 놀랄 일이 아니고, 학생이 아파트에서 자기 몸을 날려도 놀랄 일이 아니다. 오히려 놀란 척하면서 호들갑을 떠는 것이 더 가식적이고 피곤하다. 그래봤자 제대로 된 대책이나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또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조차도 놀랄 일이 아니다. 오히려 놀라면 놀랄수록 놀라는 사람만 더 상처받고 좌절된다. 그 정도로 놀라냐며 바보 취급 받기 일쑤다. 그래서 놀라지 않는 것이 조금이라도 덜 피곤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다는 것에서 놀라야 하는 것은 아마 남북의 위정자들일 것이다. 북한의 위정자는 자신들의 ‘충격과 공포’ 전략이 왜 안 먹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남한의 위정자도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큼이나 우리 국민들의 삶이 이토록 피곤해졌다는 것을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한국 국민들의 삶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완전히 소진해버린 ‘피로 사회’라는 것을 그들 모두가 깨달아야 그나마 통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놀라지 않는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이 ‘피로 사회’를 살아갈 수 있으니까.



엄기호 |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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