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이창근 | 쌍용차 해고자


 

앉았다 일어나는 순간 어질해 식은땀이 다 났다. 무력하게 기울어지는 몸. 간신히 벽을 짚고 버텼다. 처음 느끼는 어지럼증이었지만, 미련하게도 하루를 꼬박 더 견디다 결국 병원에 갔다. 뇌경색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는데 다행히 뇌경색은 아니라는 검진 결과에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급성 전정신경염이었다. 달팽이관에 문제가 생겨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한다는 전정신경염. 


그런데 급성 전정신경염은 하루이틀이면 회복된다는데, 나는 회복 속도가 더뎌 벌써 2주째 병상에 누워 있다. 일어서 걸으면 어지럽고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속은 메스껍고, 걷는 모습은 마치 좀비처럼 허우적거린다. 그동안 뼈가 부러진 경우는 있었지만, 몸의 중심을 잃어본 적은 처음이라 적잖이 긴장됐다. 겉모습만 보면 환자같지 않은데, 지병의 상태가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내 모습이 마치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곪아가는 우리 사회와 꼭 닮은 것 같아 쓴웃음이 나왔다. 


얼마 전 자율형사립고에서 1등을 하던 한 학생의 자살 소식이 매스컴 한쪽을 장식했다. 곧이어 과거 기사를 스크랩한 듯한 보도가 뒤따랐다. 그가 존재하지 않는 지금, 적어도 ‘학생은 우리의 미래’라는 말을 더는 쓸 수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경쟁만을 부추기는 입시 지옥문을 활짝 열어놓은 어른들은 반성도, 이 문을 닫으려는 노력도 하고 있지 않다. 어쩌면 그의 죽음은 ‘성공’이라는 미명하에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커다란 톱니바퀴에 자신의 몸을 던져 그 속도를 늦추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취업의 문은 좁아지고 취업 이후엔 비정규직의 삶이 펼쳐지는 세상을 그만 끝내자는 뜻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단서들은 지난 3월14일 17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초단기 계약직’ 노동자들의 여수석유화학산단 폭발사고에서도 발견한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 당연히 실행해야 할 안전예방교육은 공기 단축이라는 이름으로 묵살됐다. 결국 안전을 확보받지 못한 채 작업에 들어간 초단기 계약직 노동자들은 삶마저 단기 계약으로 마친 끔찍한 결과를 맞았다. 어린 학생의 죽음과 초단기 계약직 노동자의 죽음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발가벗은 모습으로 겹친다. 약한 자는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는 이 사회 구조에서 우리는 점차 균형과 중심을 잃어간다.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지금 가장 아픈 곳이다. 그곳이 작건 크건, 중요하건 중요하지 않건 그 부위를 치료하기 위해 모든 세포가 온 힘을 다해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를 사회에 적용하면 가장 아프고 고통받는 곳을 가장 먼저 치료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꼭 그런 건지는 의문이 든다. 아픔과 고통의 원인이 중심을 잃고 균형을 잡지 못한 결과에서 기인한다면 말이다. 초점을 잃고 방향을 상실한 채 하루하루 허우적거리며 살아가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균형을 잃은 사회는 건강할 수 없을뿐더러 한쪽으로 치우친다. 돈과 성공이라는 급성 바이러스가 만연해 사회의 전정신경을 감염시키면 우리는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차 주위를 돌볼 겨를이나 정신도 없다. 사람이 죽고 아파하고 매일 죽음의 뉴스가 끊이지 않는 사회에 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유지한다면 이는 만성화된 달팽이관의 손상이 아닐까.


대한문 앞 쌍용차 분향소 재 설치 (경향DB)


입원 2주째. 답답한 마음으로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 소식을 접하고 있다. 네댓 평도 되지 않는 분향소를 도로법을 적용해 철거한 다음, 벌써 50명이나 연행해갔다. 이건 공무집행이 아닌 폭거이며 고통스러운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행위다. 조금의 관용도 용납되지 않는 곳이 지금 대한문이다. 겨우겨우 중심을 잡아가려는 이들에 대한 벼랑끝 등떠밀기를 중단해야 한다. 급성 전정신경염을 치료하면서 우리 사회의 속도와 중심을 새삼 생각한다. 최소한 주위의 죽음이 왜 발생했고, 그 의미를 살펴볼 정신은 있어야 하지 않는가. 대한문 분향소 철거는 중심을 잃어가는 사회의 극단적 징후다.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