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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 | 역사학자



 

오래전 <논어>를 교재로 삼아 한문을 배울 때 일이다. 학생이 나름대로 해독하면 선생님이 잘못된 부분을 정정해주는 제대로 된 ‘강의’식 수업이었는데, 글을 읽어나가는 도중에 ‘자불어괴력난신(子不語怪力亂神)’ 일곱자와 맞닥뜨렸다. 누군가 “공자께서는 괴상한 힘과 어지러운 귀신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하자 바로 책상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대목은 괴력과 난신이라고 푸는 게 아니야. 괴와 역과 난과 신, 즉 괴이한 것과 힘과 어지러움과 귀신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해야지.”


공자가 괴(怪), 난(亂), 신(神)을 부정한 것은 그럴 법했지만, ‘힘’ 자체를 언급하지 않았다니, 아무리 선생님 말씀이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힘은 좋은 것 아닌가? ‘힘’을 빼놓고서야 어떻게 세상사를 논하며, 어떻게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말인가?그런데 사실 순우리말 ‘힘’도 본래 좋은 뜻은 아니다. 힘이 몸에 들어오는 것을 ‘힘든다’고 하고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힘난다’고 한다. 힘들면 괴롭고 힘나면 신난다. 힘은 사람이 일하는 사이에 슬그머니 몸안에 들어와 괴롭히다가, 적당히 쉬면 나가는 몸 밖의 귀신이나 도깨비 같은 실체였다. 그렇다고 힘이 나쁜 것만도 아니다. 무엇이든 일단 들어온 다음에야 내보낼 수 있는 법이니, 힘을 내려면 먼저 힘을 들여야 한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나 힘이 들었다 났다 하는 것이나, 다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힘은 선악을 따질 대상도 숭배할 대상도 아닌, 그렇고 그런 대상이었다. 그러니 우리 선조들이 힘을 무시한 것이 꼭 공자 탓만은 아니다.


힘 또는 능력만을 숭상하는 문화가 보편화한 것은 기계 문명시대 이후다. 기계의 가치는 ‘성능’과 ‘마력(馬力)’으로만 측정된다. 기계를 기준으로 보면 인간적 면모는 결함이지 장점은 아니다. 능력 제일주의는 기계 만능주의나 인간을 기계 취급하는 사고방식에 아주 잘 어울린다. 우리의 경우에도 힘, 능력, 실력을 숭상하는 문화는 근대 이행기에 본격적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약소민족’으로서 제국주의 열강의 힘겨루기에 희생양이 되었던 역사적 경험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경쟁 논리가 인류 진화의 유일한 동력이라고 설파하는 사회진화론을 불변의 진리인 양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힘을 숭상하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특정한 힘을 뜻하는 단어들이 무수히 만들어져 일상의 언어생활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경쟁력, 경제력, 추진력, 장악력 등. 이렇게 ‘힘’으로 표현되는 요소들은 마치 기계의 ‘마력’과 같이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객관적 지표처럼 사용되었다. 더불어 학식, 경륜, 지조, 도덕성, 감성, 인의(仁義)처럼 힘으로 치환하기 어려운 ‘인간적 요소’들의 위상은 계속 추락했다.


(경향DB)


물론 힘 중의 힘은 ‘경제력’이라고도 하는 ‘금력(金力)’이다. 자유 시장 체제에서 모든 사익 추구가 곧 공익이라고 주장하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무절제한 금력 추구를 제어했던 최소한의 도덕적 준거마저 제거해 버렸다. 지금은 남의 지식을 표절해 자기 것인 양 꾸미는 ‘간교함’이나 세금 적게 내려 재산과 소득을 속이는 ‘비루함’조차도 ‘시간과 돈을 아끼는 능력’으로 포장되는 시대다.박근혜 대통령의 첫 인사를 두고 ‘인사 참사’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이 사태를 두고 박 대통령의 인재풀을 확대해야 한다거나 인사 검증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는데, 그걸로 해결될 일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어쩌면 이번 ‘인사 참사’는 지난 10여년간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인간다움의 기본을 무시하고 돈 버는 능력만을 숭배하는 의식이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일지도 모른다. 인성이 결여된 능력은 짐승이나 기계의 능력이다. 짐승이나 기계의 ‘능력’을 숭상하는 사회에서는 짐승이나 기계 같은 사람이 모범이 되고 지도자가 되기 마련이다. 지금 우리가 진정 ‘위기의식’을 가져야 할 지점은, 바로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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