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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수요일, 간만에 봄볕이 났다. 바람이 살가워 절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봄볕과 봄바람을 맘껏 누리기 미안했다. 앞날 한 노동자가 자기 몸을 불살라 비정규직의 고통을 외쳤고, 그 이틀 전에는 한 노동자가 스스로 목매 하청노동자의 암울함을 전했다. 언제부턴가 나보다 어린 사람들의 죽음을 수없이 듣는다.


그날 오후 1시, 서울 인사동 남인사마당에서 ‘콜트기타 불매 선포 기자회견’이 열렸다. 2008년, 금속노조 콜텍지회장 이인근씨가 송전탑에 올라 ‘정리해고 철폐, 원직 복직, 공장 정상화’를 요구하며 삭발에 단식농성까지 했다. 회사도 사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송전탑에서 내려와 병원에 있던 그를 만난 지 5년이 지났다. 그 사이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투쟁, 250여차례에 이르는 가수들의 지지·연대 콘서트,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해외 원정투쟁이 이어졌다. “온갖 투쟁을 통해 자본의 가치보다 노동의 가치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리려 했다는데 무엇이 부족했던 걸까, 뭘 더 해야 할까.


구호 외치는 콜트콜텍 노동자들 (경향DB)


콜트지회장 방종운씨가 자살하고 분신한 노동자들을 안타까워하는 말로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지난 2월1일, 매각된 공장을 대체 집행한다는 이유로 용역들이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끌어냈다. 다시 들어간 공장에서 2월5일 경찰에 강제연행돼 유치장에 갇혔던 방종운씨는 경추 이상으로 몸에 마비가 와 한 달여 입원 치료를 받았다. 25년 넘게 일한 공장이 철거되는 걸 본 그는 “미래를 알 수 없는 생활에 불안하고 긴장으로 몸과 마음이 황폐해”지지만 아직 저 자리에 있다.


방종운씨 맞은편, 한 남자가 사진기를 들었다. 콜트 노동자다. 방종운씨는 언젠가 자신과 그이를 엮어 ‘못난이 형제’라고 했다. 웬만하면 돈으로 협상하고 정리할 것이지 그러지 않는 그이들을 답답해하는 목소리가, 반대로 더 세게 투쟁하지 않는다고 타박하는 목소리가 그들 스스로 자신들을 못난이 형제라고 부르게 했다. 늘 빨간 조끼를 입고 빨간 모자를 쓰는 못난이 동생 이동호씨는 2007년 정리해고와 폐업에 맞서 자기 몸에 불을 댕겼다. 만만다행히, 살아 오늘 여기 있다. 그런 시간을 지나왔다.


“여전히 기타를 생산하는 콜트·콜텍 자본은 해고노동자들을 복직시키지 않기 위해 등기부등본상 악기제조업을 삭제하고 공장을 팔아버렸지만 2012년 12월13일 콜트악기는 콜트 상표를 전자기타에 사용한다는 상표 등록을 특허청에 했다. 상표 시효는 20년이다. 이는 앞으로도 계속 전자악기 사업을 하겠다는 증거”이기에 이들은 “돌아갈 현장에 불매 선언을 하는 게 가슴 아프지만, 공장 정상화를 포기하지 않고 현장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로 어렵게 불매운동을 결정했다.


1시간여 진행한 기자 드문 기자회견. 자료는 미리 각 언론사에 보냈을 것이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불매운동 뉴스는 다음날 집으로 배달된 신문들에도, 인터넷 언론들에도 없었다. 상급인 금속노조와 지역 신문들을 빼곤. ‘한 식당’에서 신간 발표 기자회견을 하는 작가들의 기사가 여러 일간지에 크게 실리는 데 반해 노동자들의 기자회견이 잘 언급되지 않는 건, 저임금·장시간 노동에서 정리해고와 투쟁으로 이어지는 줄거리가 식상한 탓일까. 7년차에 접어든 지난한 투쟁이 구성상 별 재미없었을까. ‘콜트·콜텍 박영호 자본의 죽음의 기타 구매와 연주 거부’를 말하는 등장인물들이 틀에 박혀 보였을까. 자본에 맞선다는 주제가 허황됐을까. ‘연대’라는 문체가 개성 없었을까.


그날 낮, 친구들과 지나던 교복 입은 남학생이 스마트폰으로 ‘No Cort’를 적은 손팻말과 펼침막을 든 이들을 사진 찍었다. 점심시간일 직장인, 볼일 보러 나온 사람들이 발걸음 멈추고 가까이서 멀찍이서 이 노동자들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들었다. 모두 마음속으로 무슨 말을 했을까. 단지 물음표 하나, 느낌표 하나였더라도 눈길 준 그들이 그날 기자다.



박수정 |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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