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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 한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노인요양시설에서 치매 노인들에게 반말을 하고 고함을 지르는 행위를 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이 사건이 불거지고 처리되는 과정을 보면 학교에서 노동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들이 노인요양시설에 가서 ‘봉사’를 하게 된 이유는 상습적으로 흡연을 하는 등 학교 규정을 어겼기 때문이다. 치매 노인이라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일하는 것을 징벌의 수단으로 쓴 것이다. 이들을 위한 노동이 귀찮고, 더럽고, 힘들기 때문에 누구나 ‘기피’하는 일이고 기피하는 일이기에 징벌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학교에서는 노동을 징벌이 아닌 교육의 수단으로 쓴 것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어떤 교육적 효과일까? 학교가 생각하는 교육적 효과란 △세상에 고통받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노동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실감하고, △그들에 비해 자신이 얼마나 게으른지를 깨닫고, △그 결과 부모와 교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좀 더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최대치일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이 ‘봉사’가 전혀 교육적일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이것은 사회적 약자를 자신의 ‘행복’을 깨닫는 도구로 삼고, 노동의 ‘가혹함’을 통해 얻는 깨달음일 뿐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일상적으로 ‘노동’이 징벌로 사용되고 있다. 지각을 하면 벌로 청소를 시키고 더 심한 규정 위반은 이번 사건처럼 봉사 노동을 하게 한다. 벌로 화장실을 청소하고 있으면 다른 교사가 지나가며 “너 또 무슨 잘못 했어?”라고 출석부로 머리를 때리기도 하고 다른 학생들이 낄낄거리며 비웃기도 한다. 


청소 같은 노동을 하는 것은 공동의 생활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벌 받고 있다는 것을 전시하는 것에 불과하다. 


노동을 징벌과 교육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학교에서 대다수의 학생들은 노동자가 되는 것을 인생의 징벌, 패배로 여기게 된다. 성적이 좋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학생들도 자기가 ‘사업’을 할 것이라고 말하지 노동자가 될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겠다고 하거나 고깃집 주인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노동이 신성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사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을 신성하다고 가르치는 곳 또한 학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동은 징벌인 동시에 신성하다. 왜냐하면 노동이 교육적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징벌을 통해 교육적 성과를 가지는 순간 노동은 신성해진다. 이것이 노인요양시설에서 하는 ‘노동’이 징벌이자 교육일 수 있는 이유다. 학교에서 노동은 그 자체로 가르쳐지고 받아들여진 적이 한 번도 없다.


따라서 지금 학교에 필요한 것은 노동을 징벌로 사용하는 것도, 노동을 통한 교육도 아니라 노동에 ‘대한’ 교육이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고, 앞으로 하게 될 일이 바로 ‘노동’이라는 사실부터 알려주는 교육이 필요하다. 누가 노동자인지, 노동의 현실은 어떻고, 그 현실이 나아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고, 노동자들에게는 어떤 권리가 있는지를 발견하고 토론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얼마 전 바로 이런 일을 하다 35세의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분이 있다. 알바연대의 권문석 대변인이다. 인턴이니 뭐니 하며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며 노동을 노동이 아닌 ‘교육’으로, ‘기회’로 기만하는 행태를 고발하고 “아니야, 그건 노동이야”라고 말하던 분이다. 그 노동이 아름답거나 말거나 밥은 먹고살 수 있는 수준이 되기 위해서는 최저임금이 최소 1만원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단체의 활동가다. 그의 죽음 앞에서 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노동에 대해 말해 본 적이 있는가를 되물어 보게 된다. 그의 명복을 빈다.




엄기호 |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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