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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하고 흥겨운 명절을 못 먹고 쓸쓸히 지낼 때 ‘개 보름 쇠듯 한다’고 했습니다. 정월대보름에 개를 하루 종일 또는 저녁 한 끼 굶기던 ‘개보름쇠기’ 풍속 때문에 생긴 속담이지요. 속설에는 이날 개밥을 주면 개가 파리해져서, 개밥에 파리 꼬일 시기라 그리 한다는데, 두 번째 설은 춘하추 다 굶겨야 하니 말이 안 되지요. 아마도 ‘파리해진다’를 ‘파리가 꼬인다’로 연관지었나 봅니다. 저는 첫 번째 설을 보충하기 위해 하나 더 들어보려 합니다.

대보름에는 오곡밥에 아홉 가지 나물을 해서 먹습니다. 그러면 개밥도 오곡밥, 아홉 나물 찌끼로 줄 수밖에 없지요. 개밥 주자고 따로 밥할 리 없으니까요. 개가 육식성에서 인간생활에 맞춰 잡식성으로 진화했다지만 인간만큼 잡식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니 오곡 잔반 주면 소화불량에 걸립니다. 실제로 개는 소화불량에 잘 걸려 식욕을 잃습니다. 사람 아이도 소화기관이 덜 성숙해 여러 잡곡이 섞인 걸 먹고 탈나는 일이 잦습니다. 어른조차도 소화기가 약하면 가스 차고 신물 올라오는데요. 그러니 개는 오죽하겠습니까. 대보름 하루는 굶기는 게 나았던 거죠.

더불어 월견상극(月犬相剋)이란 말이 있습니다. 늑대가 달 보며 처연하게 울 듯, 개도 조상의 습성이 남아 달 보고 공연히 짖거나 우는 일이 심심찮습니다. 대보름달님께 두 손 모아 빌고 있는데 개가 컹컹! 워얼~ 울면 가슴속 달뜬 소망이 ‘개망’하겠죠. 그러니 기운 빼버리자며 쫄쫄 굶겼을 텝니다. 이유가 뭐였든 영문 모를 개는 허기진 눈으로 휘영한 대보름달만 치어다봅니다.

오늘 달 볼 시간도 없이 늦도록 형광등 밝히는 책상이, 귀밝이술 대신 혼술하는 잔이 있을 겁니다. 허전한 책상에 부럼 담뿍 놓아줍시다. 지금 잔 하나냐며 대작하자 불러냅시다. 혼자 개보름 말고 같이 대보름 쇠자, 같이 달 보자 합시다.

<김승용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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