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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가 좀 있는 출판사를 다닐 때였습니다. 일 때문에 교정팀에 갈 때마다 교정지가 담긴 상자들에 성곽처럼 에워싸이다 못해 교정지 묶음들이 책상 밑까지 꽉꽉 차 있는 게 눈에 밟혔습니다. 그래서 물어보니 과실책임 대비로 몇 년 지난 것까지 보관해야 한다며 한숨을 쉬더군요. 그럼 연속급지에 PDF파일 자동생성 스캐너를 쓰면 되는 거 아니냐 하니, 그런 게 있냐고 반색을 합니다. 그런데 그 스캐너가 수백만원은 넘는다고 하니 절레절레 다시 한숨이더군요. 품의서를 올린들 짠돌이 관리부가 받아줄 리 없다며 말이죠. ‘넘어도 안 가본 고개에 한숨부터 쉰다’더니 해보지도 않고 낙심하고 겁부터 내더이다.

이 짐 지고 저 고개 넘을 생각을 하니 가기도 전에 다리가 풀립니다. 넘긴 넘어야 하는데 ‘아이고, 저걸 언제 넘나’ 고개를 떨구면서 땅이 꺼져라 푹 한숨을 쉽니다. 그러나 그 고개는 높지 않습니다. 사실 높이가 없으니까요. 멀리서 볼 때는 높아 보이지만 막상 고갯길 밟아 들면 그저 작은 오르막과 오르막들뿐입니다. ‘가다 보면 가게 되겠지.’ 끙차! 일찍 털고 일어난 사람은 가다 쉴 짬이라도 생깁니다. 미적거리다가 때늦은 사람은 컴컴하게 저무는 숲길만 허겁지겁 내닫게 되고요. 언제 넘나 건너다봄도, 얼마나 남았나 올려다봄도 없이 묵묵히 내딛다보면 어느덧 고갯마루 시원한 바람에 땀 씻으며 온 길 뿌듯하게 돌아볼 겁니다.

아까 그 교정팀 스캐너 건은 어찌 됐냐고요? 내방객의 첫인상과 공간 확보로 업무효율 상승, 타 부서의 다양한 활용 등을 강조하며 비용 대비 이익이 더 크다고 했더니 바로 결재 떨어지더군요. 일의 중요한 고비나 절정도 고개라 합니다. 닥치고 부딪칠 고개 앞에서 ‘죽어도 못해’ ‘저걸 언제 다 해’ ‘아마 난 안될 거야’ 하지 말고 어떻게든 하다보면 어떻게든 됩니다.

가슴에 바람(望) 빵빵 고개 들고 나섭시다. “직진! I am.”

<김승용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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