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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진(晉)나라에 겨우 열네 살인 주(周), 즉 훗날 도공(悼公)이 왕위에 오릅니다. 그에게는 형이 있었지만 너무 어리석어 콩과 보리조차 구분 못한다(不能辨菽麥)고 옹립되지 못했습니다. 사리분별 못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을 뜻하는 ‘숙맥’의 어원, 숙맥불변(菽麥不辨)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고많은 곡물과 사물들을 제쳐두고 굳이 ‘콩과 보리’를 언급했는지 저는 늘 궁금했습니다.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만족스러운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책을 읽다가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리는 익는 속도가 느려 쌀과 섞으면 한 번에 삶기지 않으므로 두 번 삶는 ‘곱삶이’를 하거나 보리를 반으로 쪼갠 ‘할맥(割麥)’으로 섞어 삶아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콩 역시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는 말처럼 두 쪽으로 나뉘는 곡물입니다. 다시 살펴보니 ‘辨’자 역시 ‘분별하다’와 ‘나누다/쪼개다’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숙맥불변은 콩과 보리도 ‘구별 못하다’와 ‘쪼개지 못하다’ 둘 다 가진 ‘辨’자를 이용한, 옛 중국인들의 말장난은 아니었나 싶은 게 제 생각입니다. 머리도 나쁘고 재주도 없단 거죠.
흔히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만 숙맥이라 합니다. 하지만 辨의 두 가지 뜻이 알려주듯, 사리분별 못하는 사람 또한 숙맥입니다. 무언가를 분별하려면 떨어져 바라봐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쪼개진 어느 한쪽에 붙어 자신이 믿는 채널과 기사만 온전히 믿습니다. 이 뉴스는 옳고 저 기사는 온통 거짓이라며 반대쪽은 들춰도 안 봅니다. 입장과 성향은 언론사마다 다릅니다. 이목을 한쪽에만 고정하면 주 시청자·독자 입맛에 맞춰 가공된 것들만 들어오지요. ‘한편 말 듣고 송사(訟事) 못한다’는데, 양쪽 말 들어보지 않고 한편 말만 듣는, 사리분별 못하고 숙맥 같은 판결만 내리는 우리 아닐까요?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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