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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직설]곁의 온도

opinionX 2018. 7. 31. 09:45

병상에 계신 황현산 선생님을 뵙고 왔다. 쇠한 기력과는 달리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선생님, 저 왔어요. 일부러 더 씩씩하고 명랑하게 인사했다. 목소리는 잠겨 있었지만 끔벅이는 눈으로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서로 눈을 마주친 것뿐인데, 잘 지내니, 별일 없니, 오랜만이지?, 살이 좀 빠진 것 같구나, 이리 와서 여기 좀 앉거라 등의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잘 지냈어요, 별일 없어요, 오랜만에 찾아와서 죄송해요, 살은 다시 찔 거예요, 선생님 곁에 바짝 다가앉을게요 등의 말을 쉴 새 없이 쏟아냈다.

연일 폭염이었는데, 선생님을 찾아간 날에는 비가 왔다. 그야말로 단비였다. 하늘도 끔벅이는 눈처럼 갑자기 어두워졌다가 천천히 밝아졌다. 소낙비가 내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감쪽같이 갰다. 끔벅인다는 것은 ‘갑자기’를 ‘천천히’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병과 아픔과 슬픔은 갑자기 찾아오고 아주 천천히 회복된다.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마음처럼.

병실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선생님 곁을 지키기 위해, 곁에서 더욱 뜨거운 말을 전하기 위해, 곁에서 눈을 마주치고 함께 호흡하기 위해. 누군가의 곁에 다가간다는 것은 나의 틈을 내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다. 시간의 틈을 벌려 여유를 만들고 공간의 틈을 벌려 그 사람을 나의 영역으로 끌어당겨야 한다. 곁을 준다는 말이 속을 터준다는 뜻인 것도, 곁을 지킨다는 말이 믿음에 뿌리를 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곁이 비어 있을 때 그리움의 감정은 커지고 곁이 많을 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글 쓰시고 밥 드시고 사람들에게 서슴없이 내미시던 손을 잡아드리는 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선생님께 병원 이불의 재질이 좋다고 말씀드렸더니, 집에 갈 때 하나 달라고 해야겠다고 희미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농담을 곁에 둘 수 있는 상태를 확인하니, 적이 안심이 되었다. 동시에 집에 간다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말에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저 말은 꼭 씨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소연의 <한 글자 사전>(마음산책, 2018)에는 한 글자로 된 다양한 단어가 등장한다. 나는 ‘곁’이라는 단어에 오래 머물렀다. “ ‘옆’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나와 옆’, 그 사이의 영역. 그러므로 나 자신은 결코 차지할 수 없는 장소이자, 나 이외의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는 장소. 동료와 나는 서로 옆을 내어주는 것에 가깝고, 친구와 나는 곁을 내어준다에 가깝다.” 이처럼 나의 곁과 너의 곁이 항상 같을 수는 없다. 관계 사이의 오해는 사실상 옆을 곁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옆이라는 말이 공간적 거리를 지칭한다면, 곁이라는 말은 그 안에 심리적 거리를 포함한다. 옆에 있다고 해서 다 가깝다고 느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곁에는 거리감뿐만 아니라 양감과 질감, 온도와 습도 같은 성질이 다 담겨 있다. 무수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곁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곁에 다가오지 않았거나 옆에 있는 사람들을 곁에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선생님이 자신의 곁이 꽉 차 있다고, 온기로 가득하다고 느끼기를 바랐다.

살아가면서 곁을 잘 챙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삶을 살아 있게 해주는 것도 곁이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품고만 있고 전달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곁에 두는 것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나를 정말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집에 와서 선생님의 책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난다, 2018)을 다시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어떤 부탁은 사소하고 어떤 부탁은 절실하다. 사소하다고 해서 부탁을 쉬 지나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절실하다고 해서 부탁을 다 들어줄 수도 없다. ‘갑자기’와 ‘천천히’가 한 단어에서 만나듯, 두 눈을 끔벅이며 사소하면서도 절실한 기도를 했다.

선생님 곁에 더 오래 있고 싶다고. 곁의 온도와 습도가 한동안 유지되었으면 좋겠다고.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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