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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되기 바쁘지 않다. 먼저 철저한 민주주의자가 되어야겠다. 시는 그다음에 써도 충분하다. 시인은 누구보다도 먼저 진정한 민중의 소리를 전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투철한 민주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인민을 위한 전사가 되는 것”이다. 한 무명 시인(?)의 글이다. 1948년 유진오 시인이 자신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이 된 <창(窓)> 서문에 쓴 글이다. 그는 전쟁이 발발한 1950년 사상범으로 분류돼 처형당했을 거라 알려진다. 이십대 문청시절 우연히 이 글을 접하곤 아, 이게 내 삶이었으면 했다.

지금도 ‘시인’이기 전에 그런 ‘민주주의자’가 되고 싶다. 지금은 흔치 않지만 많은 이들이 ‘민주주의자’가 되고 싶어 하고, 먼저 ‘전사’가 되기 위해 문학을 뒤로하고 공장으로 농토로 빈민가로 가던 시절이 있었다. 자신의 글보다, 노동자 민중들이 자신들의 말과 글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대중문학운동에 청춘을 바친 벗들이 있었다. 조영관 형은 그런 선배 중 한 분이었다. 서울시립대 영문과 출신, 좋은 출판사에도 잠깐 있어 봤다. 80년대 구로공단과 부평공단을 찾아 노동자의 길을 걸었다. ‘동미산업’에 노조를 만들었다가 구사대 테러로 죽을 고비도 넘겼다. 해고, 수배 이후 인천지역 건설일용노동조합을 만들고, 현장에서 만난 동료들과 ‘햇살공동체’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90년 초반 사회주의권이 붕괴되며 많은 이들이 유진오의 길이 아닌, ‘얻은 건 이데올로기요, 잃은 건 예술이다’라며 훼절해 간 박영희의 길을 따라 떠났지만, 그는 도대체 무엇이 바뀐 것인지 알 수 없어 제관공으로 남았다.

시인이자 르포 작가인 박영희씨 _경향DB


이번주 토요일엔 그를 찾아 마석모란공원엘 간다. 간암으로 우리 곁을 떠난 지 9년. 형과 가리봉 오거리에서 막걸리 들이켜며 세상을 얘기하던 그 모든 ‘우리’들이, 친구들이 떠오른다. 그런 우리들을 기억하자고 형의 짧은 생의 이름을 빌리고, 가난한 호주머니들을 털어 무명의 문학창작기금을 만들었다. 벌써 6회째다. 어느 현장에선가 다시 철근처럼 굵은 시를, 황소처럼 힘센 시를, 뻘밭을 뜨는 삽처럼 묵직한 글을 쓰기 위해 힘쓰는 이들에게 작은 힘이라도 되길 바란다. 올해 수혜자는 소설을 쓴 하명희씨다.

송경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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