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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14일 민중총궐기 현장에서 경찰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후 서울대병원에서 몇 개월째 사경을 헤매는 일흔 노구의 농민이 있다. ‘개사료값보다 못한 쌀값’, 노동법 개악, 역사교과서 국정화 등 온갖 ‘학정’에 분노해 전남 보성군 웅치면에서 새벽밥 먹고 올라오셨던 백남기 선생이다. 그는 1971년 10월 중앙대에서 위수령에 맞서는 시위를 주도하다 1차 제적되고, 1973년 2년여 동안 수배 생활을 해야 했다. 1975년 2차 제적 후 1980년 ‘서울의 봄’ 때 복교됐지만 그해 5월8일 교내에서 박정희 유신잔당 장례식 시위를 주도하고, 5월15일 4000여명의 학우들과 일명 ‘한강도하’ 행진을 하며 전두환 신군부 출현을 막고자 했다.

전국으로 계엄이 확대되고, 5월17일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들이 교정으로 들어올 때, 그는 지하통로로 빠져나가는 것을 거부하고 체포되었다. 그 다음날 광주 도청에서 5·18학살이 일어났다. 고춧가루 물고문과 성기를 불로 지지는 고문이 이어지는 고문실에서도 그는 지지 않았다. 수도군단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이듬해 3·1절 특사로 풀려난 후 고향 보성군 웅치면으로 내려가 농민운동을 하며 살아오셨다. 박정희 정권 때에는 제적과 수배, 구속, 물고문을 당하고 그의 딸이 집권하는 시대에는 물대포에 맞아 생명마저 내놓아야 하는 인생이 그분만의 서러움은 아닐 듯싶다.

마을 주민들 곁에서 징을 치고 있는 그분 사진을 볼 때마다 함께 떠오르는 이가 ‘물봉’ 김남주 선생이셨다. 두 분은 생김새도 삶도 닮았다. 김남주 선생은 1972년 전남대에서 반유신투쟁으로 구속, 제적당했다. 1977년 귀향해 해남농민회를 만들고, 1979년 남민전 활동으로 구속돼 1988년에야 풀려났다. ‘바람에 이는 풀잎으로 5월을 노래하지 말라 했다.’ 얼마 후 2월13일이면 22주기가 된다. 김남주 선생이 생전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냐”고 절규할 때 많은 이들이 ‘민주화’되었지 않았냐고 했다. ‘민주화?’, 백남기 선생 둘째 따님 이름이 ‘민주화’다.

‘민주화’의 가슴은 오늘도 짓밟히고 있다. 안타깝지만 ‘학살’은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이다.

송경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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