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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강남역 8번 출구 앞에서 삼성반도체 백혈병 희생자인 황유미씨 9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스물셋에 반도체공장에서 직업병을 얻어 생을 마감한 한 소녀의 이야기.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 거리로 나선 황상기 아버님. 한 명 두 명, 용기를 내어 나타나기 시작한 반도체공장 직업병 사망자들이 134명, 투병자들이 233명이었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으로도 알려졌던 일이다.

박일환 시인의 르포집 <삼성반도체와 백혈병>도 있고, 르포작가 희정의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도 나왔었다. 김성희씨의 만화책 <먼지 없는 방>과 김수박씨의 만화책 <사람냄새>로도 그려졌다. 극단 ‘날’이 연극 <반도체소녀>로 기억해내기도 했다.

하지만 9년이 지나고도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예년보다 초라해진 추모제. 여러 희생자 가족들, 반올림 활동가들인 이종란, 공유정옥씨와 삼성바로세우기운동본부의 조대현씨 등 몇 사람의 얼굴이 가슴에 박혀 왔다. 그간 무너져 왔던 그들의 마음을 다 쓰려면 몇 백 편의 시와 노래와 르포와 소설과 영상이 더 나와야 할까.

삼성 바로잡기 문화제에서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발언 후 무대를 내려가고 있다_경향DB

얼마 전 194시간 동안 테러방지법 통과 저지를 위한 국회 필리버스터가 있었다. 세계 최장시간 이어말하기니 하면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하지만 끝내 여야 국회는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고 우리 모두의 인권과 자유를 괴물 국가와 국정원에 넘겨주고 말았다. 그 이전 154일 동안 삼성전자 앞에서 ‘삼성이어말하기’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아는 이들이 없었다. 길거리에서 쉼 없이 필리버스터를 해 온 사람들에 대해 언급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행히 위안부 소녀상이 전국을 넘어 전 세계에 세워지고 있지만, 삼성전자 앞 농성장에 허름하게 앉아 있는 백혈병 소녀상은 외롭기만 하다. 전국의 위안부 소녀상 옆에 삼성 백혈병 소녀상들이 함께 앉을 수 있을 때, 우리가 제국주의의 하위 파트너가 되어 참전했던 베트남전 희생자 소녀상이 함께 앉을 수 있을 때, 지금 이 땅에 다시 노예처럼 팔려 와 온갖 인격 침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제3세계 이주노동자 소녀상이 함께 앉을 수 있을 때, 한국 기업들이 동남아에 진출해 약탈하고 있는 제3세계 소녀상들이 함께 앉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야만의 근대를 넘어 조금은 다른 현대로 넘어갈 수 있는 것 아닐까.

그 자리에서 다시 추모시를 읽어야만 했다.

‘당신은 단지 방독면을 쓰고 들어가야 하는 어느 밝은 클린룸에서 하얀 소복을 입은 채 죽음의 용액에 반도체를 씻어내며 열심히 일했을 뿐이다. 그런 당신 영전에 나는 어떤 소망의 만장을 걸어주어야 할까. 어떤 사랑의 만가를 불러주어야 할까. … 삼성이라고 얘기하기엔 너무 사실적이어서 안돼, 근로복지공단과 노동부와 산업안전공단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얘기하는 것도 심드렁해. 나는 누가 스물셋 꽃보다 아름다운 당신을 죽였다고 저 하늘 저 땅에게 고해야 할까.’


송경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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