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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시인, 신부님께 드리는 시 안 써왔어!” 준비 못한 줄 알면서 사진가 노순택이 짓궂게 나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그래, 즉흥시라도 해봐.’ 다른 벗들도 덩달아 나를 궁지로 몬다. 그렇잖아도 신부님 찾아뵌 게 언젠지 죄송해 술잔만 비우고 있는데, 나쁜 사람들. “시가 뭐 자판기도 아니고… 안 돼요” 하면서 신부님 얼굴을 살피니 ‘네 놈에게 내가 뭘 기대하겠니’ 서운함이 역력하다. 어떻게 이 곤경을 벗어나야 하나. 이럴 땐 담배 한 대 피우는 게 제일.

마당으로 나오니 캄캄한 밤하늘에 보름달 하나 덩그러니 걸려 있다. 지금은 제주도 강정마을로 아예 거처를 옮기셨지만, 이곳 군산에서 정신지체 아이들을 가족 삼아 ‘작은 자매의집’에서만 21년을 사셨고, 지금도 ‘평화바람’ 사람들이 지키고 있는 이 집에서 대부분의 삶을 보내셨던 신부님. 이렇게 서늘한 밤이면 저 달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언젠간 저 달을 보며 신부님을 그리워해야 하는 날이 올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에 가슴이 저며왔다. 3월24일은 ‘금경축미사’. 문정현 신부님이 신부 수품을 받으신 지 50년이 되는 날. 그 긴 세월을 성당 안보다 고난 받는 자들의 현장에 더 많이 서 계셨던 ‘우리들의 하느님’. 정말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닌데 나도 모르게 시를 적고 있었다. 종이라고는 내려오기 전 서울에서 시집을 수령하며 받았던 세금명세서 용지뿐. ‘사람들이 쓰러진 거리 위에/ 마지막까지 서 있던 달/ 사람들이 끌려간 공장 마당에 마지막까지 떠 있던 달/ 포크레인 위에 올라 있던 달/ 구치소 창살 안에 갇혀 있던 달/ 모든 파헤쳐지는 슬픔 위에/ 아픔 위에 고통 위에 설움 위에/ 분노 위에 떠 있던 달/ 평택 대추초교 지붕 위에 떠 있던 달/ 용산 철거민 망루 위에 떠 있던 달/ 천년의 강 위에 떠 있던 달/ 강정 구럼비 바위를 끌어안고 울던 달/ 콘크리트 바닥 위에 쓰러져 신음하던 달// 그러나 세상의 평화는 지지 않으리/ 그러나 평등의 노래는 그치지 않으리’ 그전까지 ‘현장 청탁’을 받고 가장 짧은 시간에 써본 시는 용산참사 때 문화 프로그램이 없으니 추모문화제를 빙자한 불법집회라고 경찰들이 에워싼 일촉즉발의 상황. 바닥에 나뒹구는 유인물을 주워 15분 만에 적은 시였는데 이번에 그 기록을 깼다. 딱 담배 한 대 타들어갈 시간. 10여분 만이었다. 내 가슴속에도 신부님께서 오래 계셔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주 해군기지 예산통과에 항의삭발한 문정현신부의 눈물_이상훈 선입기자


“험, 험, 신부님은 이렇게 10분 만에도 시를 짓게 하시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셨습니다.” 기고만장, 너스레를 떨며 즉석 헌시를 낭송하는데 어느 대목에선가 울컥 목이 메어왔다. ‘우리는 하느님을 몰랐지만/ 신부님을 만나며/ 가난한 자들의 하늘을 보았으니/ 신부님을 따라 걸으며/ 정의로운 자들의 하늘을 보았으니/ 세상의 복음을 알았으니.’

신부님, 우리 곁에 오래오래 계셔 주세요. 서울에서는 유성기업 한광호 열사 시청 분향소를 지키던 벗 오진호와 김정도가 또 연행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캄캄한 밤이었다.


송경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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