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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광주. 수많은 시민군들 속에 함평고구마처럼 투박하게 생긴 한 소년이 있었다. 광주기계공고 3학년 학생이었다. 사람들이 맞고 끌려가고, 죽어가는 야만의 현장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들 수 있는 모든 것을 함께 들었다. 장갑차에 올라보기도 했다. 별다른 일이 아니었다. 평범한 광주 시민들이 모두 그러했다. 상무대에 즐비하게 누워 있던 시신들. 그 5월을 소년은 끝내 잊을 수 없다.

세월이 흘러 2009년 평택 쌍용자동차에 소년은 노조 위원장이 되어 서 있었다. 광주에서처럼 다시 머리 위로 헬기들이 날고, 테이저건과 곤봉과 전기충격기로 중무장한 테러진압부대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77일 옥쇄 파업하는 동안 동료 노동자 가족들 6명이 스스로 목숨을 버려야 했다. 자신과 함께 일하던 노조 정책부장 부인이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아파트 베란다로 걸어가 뛰어내렸다 했다. 나는 다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도장공장에는 엄청난 인화물질들이 쌓여 있었다. 이곳이 다시 5·18 전남도청이 되어야 하나. 그러나 마지막까지 그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수많은 동료들이 맞고 끌려가는 것을 다시 보아야 했다. 수십년 일한 현장에서 ‘함께 살자’는 소박한 요구였다. 모든 책임을 지고 감옥으로 끌려가 3년을 꼬박 보내야 했다. 세상은 자신을 기억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결단은 계속 요구되었다. 2012년 11월20일 새벽 4시. 12만5000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송전탑 아래에 소년은 다시 배낭 하나를 메고 서 있었다. 감옥에서 나온 지 이제 갓 3개월. 이제 저 ‘하늘감옥’으로 오르면 언제 또 이 평지를 밟아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올라가세.’ 문기주, 복기성 두 벗과 함께였다. 그간 쌍용차 정리해고 희생자들은 22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렇게 171일 동안 다시 하늘에 갇혀 있어야 했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조계사 관음전을 나오고 있다_경향DB

그러곤 지난해 12월10일 그는 다시 조계사에서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끌려가야 했다. 2015년 4월16일 세월호 1주기 추모 투쟁과 이어진 4월24일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 그리고 5월1일 메이데이 투쟁과 11월14일 14만 민중총궐기 투쟁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진 ‘민주노총 위원장’이었다. 6개월을 민주노총에서, 1개월여를 조계사에서 갇혀 지낸 후였다.

소년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어떤 민주주의 현장에서도 본 적 없던 이들이 스스로 민중의 지팡이가 되겠다고 선거판을 쫓아다니고, 그들에 대한 기사가 매일매일 쓰레기처럼, 오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4월. 민간인을 강제진압하며 불태워 죽인 전 서울경찰청장 김석기가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4월. 세월호 진상규명을 막고, 야합하고, 막말을 일삼아 온 이들이 다시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4월.

5·18 당시 국보위에 참여한 자가 제1야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이 되어 떠드는 4월. 한 서생이 갑자기 광주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4월. 소년은 다시 창살 너머 먼 별들을 보며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배태선은, 남정수는, 박준선은, 이현대는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송경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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