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몇 년 동안 산 자들과 살지 못하고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았다. 문득 젊은 날 한때 내 의식과 행동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던 문구 하나가 떠오른다. ‘자유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숙고가 아니라 삶에 대한 숙고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나오는 이 구절을 만나며 나는 청년시절 내내 빠져들던 어둡고 염세적인 절망의 포즈와 결별하게 되었다. 삶에 대해 숙고하기에도,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에 하루하루 반응하고 환호하기에도 바쁜데 웬 죽음에 대한 숙고인가 하는 대전환이기도 했다. 근래 몇 년 동안 수많은 열사 투쟁에 함께하면서, 죽겠다고 고공과 망루로, 단식으로 빠져드는 사람들을 함께 지키자 하면서도 진정한 바람은 빨리 생에 대한 즐거운 숙고의 시간으로 넘어가자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바람과 달리 끝도 없는 죽음의 수렁으로 온 사회가 침몰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무섭고 두렵다. 세월호 선실에 갇혀 있던 아이들의 공포가 이러했을까.

지난주 토요일에는 다시 쌍용차 정리해고 관련 25번째 희생자였던 고 정한욱님에 대한 추모시를 써야 했다. 그는 가족과도 헤어져 혼자 살던 창원의 한 아파트 난간에서 쓰러져야 했다. 해고된 이후부터 그들에겐 이미 모든 곳이 차고 어두컴컴한 망망대해였다. 끝모를 고통의 파도가 덮치고 더 내려갈 길 없는 슬픔의 심해에 갇혀야 했다. 모든 문이 닫히고 막혀 있었다. 함께 살자고 아무리 두드려보아도 이 사회는, 정부는, 국회는, 노동부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생활 밑바닥은 이미 빵구난 지 오래, 다정했던 모든 관계의 선들이 끊어지고, 기울어진 생의 밑바닥부터 슬픔의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에겐 누가 손을 내밀어주어야 하나. 그들에겐 언제나 구조함이 도착하나. 우리는 이 지상에조차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다.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문형표장관 집앞에서 촛불집회(출처 :경향DB)


고 송국현 님을 추모하는 시도 써야 했다. 23년 동안의 시설 생활 끝에 자립해보겠다고 얼마 전 세상 밖으로 나온 그는 자신의 방 침대 위에서 산 채로 화장당했다. 자동센서가 부착된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지만 활동보조인의 도움 없이는 한 치도 움직일 수 없는 중증장애인인 그에게는 자신의 침대 밖이 모두 망망대해였다. 죽기 며칠 전까지 그는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투쟁의 맨 앞에 앉아 있었다. 35만명에 이르는 장애인들이 오늘도 이렇게 어디엔가 갇혀 있고 고립되어 있다. 다름이 있다면 세월호는 단숨에 침몰했고, 그들 35만명의 장애인들은 서서히 시나브로 한 척씩 침몰해 왔다. 우리는 어떻게 이 잔혹한 사회의 심해에서, 불구덕에서 죽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 탈출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이 참혹한 세월의 시설들로부터 벗어나 존엄한 생의 자립을 이룰 수 있을까.

장례도 못 치르고 있는 밀양의 유한숙 어르신에 대한 추모시도 다시 한 편을 써야 했다. 밀양에 마지막 남은 농성장들을 강제 철거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이 나온 이후였다. 도대체 이 지상에서도 곧 죽겠다는 사람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들을 구하지 않는 이 정부와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어떤 세월호에 대한 진정성을 바랄 수 있을까. ‘우리에겐 헬기가 나르는 전쟁의 하늘이 아니라/ 잠자리가 나르는 평화로운 하늘이 필요하다고/ 모든 생명의 숨구멍을 막는 개발의 레미콘과 파괴의 포크레인이 아니라/ 모든 살림의 작은 호미와 부드러운 삽날이 필요하다고/ 죽음의 전기가 아니라 핵발전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존엄한 마음의 발전이라고/ 우리에게 송전되어야 하는 것은/ 무한 소비와 소유의 욕망이 아니라/ 무한 축적의 빈틈없는 전선이 아니라/ 어디선가 다시 새로운 사회를 향한/ 연대의 전선이 투쟁의 전선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는 희망의 송전이라고’ 다시 외쳐 보았으면 좋겠다.

이 모든 와중에 까마득히 잊혀져 있는 한 사람도 기억했으면 좋겠다. 한강의 기적과 함께 한국 근대화의 상징이라는 경부고속도로 옥천나들목 옆 광고탑에서 오늘로 197일째 고공농성 중인 유성기업 노동자 이정훈이다. 그는 아직 살아 있으니 다행인가. 박근혜 정부는 그 틈에도 그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2일날은 그의 고공농성 200일을 기억해 옥천으로 가야 한다. 한국 사회라는 세월호에 타고 있는 이 수많은 노동자 민중은 도대체 어디로 가란 말인가. 이 세월호는 위험하니, 이 세월호의 선장은 믿을 수 없으니 어서 빨리 이 그릇된 시대의 선실로부터 탈출해 다른 사회로 건너가야 한다는 믿음의 안내방송을 들을 수 있을까. 더 이상 죽음에 대한 숙고가 아닌 생에 대한 연대와 투쟁과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송경동 | 시인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