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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내 꿈이었던 개인 사무실을 냈다. 8층 전면유리 아래로 시흥대로가 훤히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기역자로 넓은 책상을 배치하고, 한쪽엔 침대도 만들어 두었다. 지난해 12월30일 회사가 도망이사를 가고 난 기륭전자의 휑뎅그렁한 사무실 한편이다. 처음엔 불도, 물도 없었는데 웬일인지 얼마 전부터 전기와 수도와 중앙난방을 모두 열어주었다. 이런 좋은 곳에서 달달 떨며 두 번이나 심한 감기몸살을 앓았던 생각을 하니 은근히 약이 오르긴 한다. 갑자기 선심을 쓰는 게 아마도 끌어낼 때가 가까워오는가 보다.


2010년 10월 어느 날이었다. 주변 공기가 심상치 않더니 무장경찰들이 밀려들었다. 카고차와 앰뷸런스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오도가도 못하는 포클레인 위였다. 건너편 공장 1층 옥상에는 단식 중인 여성조합원 둘이 흰 소복을 입고 야위어가고 있었다. 



어떡해야 하나. 농성장 옆에 세워둔 가스통이 눈에 들어왔지만 누구에게도 요구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눈도 입도 닫고 근 4시간을 포클레인 붐대 맨 끝에 올라 마침 위로 지나가던 전깃줄을 잡고 매달려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조금은 더 안전하고 행복하고 평화로우면 좋을 텐데 하는 서늘한 생각뿐이었다. 그런 수많은 눈물들이 모여 그해 11월1일, 

기륭전자 노사 합의가 이루어졌다. 삭발이니 3보1배니 하는 자잘한 일들 빼고 50일간의 공장점거 농성과 세 번에 걸친 고공농성, 김소연 당시 분회장의 94일에 이르는 단식, 두 번의 국회점거 농성, 다시 한 번의 단식과 두 번의 포클레인 점거농성 등 1895일 동안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투쟁을 해온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들의 초인적인 승리였다. 그 호소에 함께한 수많은 연대의 힘들이 이룬 눈물겨운 승리였다. 

당시 국회의 요청을 받아 국회 귀빈식당에서 사회적 조인식을 가졌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년6개월의 유예기간을 1년 더 연장하는 동안, 최동열 회장은 중국 공장을 처분하고, 현재의 신사옥 역시 매각해 버렸다. 법인명도 바꾸고, 연구기술직 등 100여명도 모두 정리해고해 버렸다. 며칠 전 결국 증권거래소에 의해 상장폐지가 결정되었다.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한진중공업도, 유성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2012년 9월 국회청문회와 연이은 국정감사를 통해 사측의 부당노동행위와 상상을 초월하는 인권 탄압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노동부와 검찰이 몇 차례에 걸쳐 특별근로감독과 압수수색 등을 진행하기도 했다. 당시 창조컨설팅의 심종두 대표와 김주목 전무는 노무사 자격이 박탈되었고, 법인이 해체당하기도 했다. 이를 사주하고 지휘한 유시영 사장과 두 공장장에겐 사법처리가 필요하다는 고용노동부와 경찰의 기소 의견이 몇 번에 걸쳐 검찰에 전달되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검찰은 2년여를 끌다 결국 불기소 처리하고 말았다. 당시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을 파괴하는 시나리오에 등장했던 청와대, 국정원, 노동부, 경찰, 경총, 원청인 현대차에 대한 문제 제기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과정에 노동자들만 17명이 구속되었다. 부당해고 당한 27명이 승소했지만 여론이 잠잠해지자 사측은 11명을 재해고시켰다. 12억원에 달하는 손배가압류가 떨어졌다. 국가도 별도로 1억2000여만원의 손배가압류를 청구했다. 관리직들까지 위장 가입시켜 어용 복수노조를 대표 교섭단체로 만들고 민주노조 조합원들 수십명에게는 정직과 출근정지를 반복했다. 

첫 시작은 심야노동철폐, 주간2교대라는 요구였다. 그것이 그토록 큰 죄였을까. 지난 3년여 동안 홍종인 지회장은 목에 밧줄을 묶고 한겨울에 굴다리 고공농성을 151일 동안 했고, 며칠 전까지 경부고속도로 옥천IC 근처에서 129일 동안 철탑 고공농성을 해야 했다. 지금도 그곳에 이정환 영동지회장이 혼자 남아 겨울의 마지막을 지키고 있다. 아, 이런 것을 총체적인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일까. 이렇게 누군가 목숨들을 걸고 싸우는 데도 너무나 조용한 세상 속에서 1700만 노동자 가족들의 힘겹고, 분노스러운 하루가 또 저물어간다.

하다못해 지하철 무임승차만도 약속을 어긴 대가로 30배의 벌금이 부과되는데, 국가와 의회와 시민사회 모두가 참여해 수많은 사회적 시간과 자원을 투여하고, 여러 출혈과 갈등해결 비용을 지출한 후 이룬 사회적 약속을 헌신짝 취급하는 이런 악덕 기업주들에게는 도대체 몇 배의 책임을 물어야 할까. 그것 없이 어떤 국민이 다시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 싸울 수 있으며, 진실은 밝혀지고, 정의는 바로잡혀질 수 있다는 꿈을 가질 수 있을까. 이렇게 공공연하게, 버젓이 사회적 윤리를 파괴하는 반공공세력들은, 반국가단체들은, 대국민 사기집단은 어떤 철퇴로 다스려져야 할까. 이런 불의를 잊지 말자고, 함께 이겨 나가보자고 다시 희망버스 승객들이 출발한다. 한 대여도 좋다고 백기완 선생님과 노나메기 어른들이 먼저 제안해주셨다. 

3월15일. 154일차를 맞는 유성기업 고공농성 연대를 위한 희망버스다. 이 눈물겨운 세상이 조금은 평온해지기 위해 구속되어야 하는 것은 기륭전자 최동열이라고, 한진중공업 조남호라고, 유성기업 유시영이라고, 대법판결조차 무시하는 현대차 정몽구라고, 악질적인 콜트콜텍의 박영호라고 함께 외쳐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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