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한국 사회가 꾸준히 생산하는 신조어의 정확한 뜻과 이의 배경을 간혹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다. 대한항공의 조모 전 부사장이 일으킨 이른바 ‘땅콩회항사건’에 이어 최근에는 인터넷 관련 사업으로 성공한 양모 회장의 엽기적인 행동이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고 있다. 두 사건에 대한 언론보도에는 모두 ‘갑질’이라는 신조어가 붙었다. 갑을관계는 내가 서울의 출판사와 계약할 때 출판사와 저자를 각각 갑과 을로 약칭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갑질이라는 단어가 십간(十干)의 첫 자 ‘갑’에 도적질처럼 어떤 행동이 지속될 때 부정적이거나 저속한 뜻을 담은 접미어 ‘질’을 합성한 단어라는 것을 얼마전에 알았다. 그래서 이 단어를 가령 영어나 독일어로 옮기면 가장 가까운 단어가 무엇인지도 한번 생각해 보았다.
중세 프랑스어에서 기원하고 17세기경부터는 영어나 독일어에도 자리 잡은 ‘chicaner’(억지부리며 괴롭히다)라는 단어나 20세기 중엽부터 일반화된 영어의 ‘mobbing’(따돌리며 괴롭히다)이라는 단어가 갑질의 의미에 가깝다고 여겨졌다. 두 단어 모두 사회생활에서 관리나 상관이 특정인을 상대로 심리적인 모욕이나 고통을 지속적으로 가함으로써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하고 파괴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유럽연합은 2002년 1월에 손해배상은 물론 가해자의 형사적인 처벌까지도 가능케 하는 ‘모빙방지법’을 회원국이 2010년까지 제정하도록 했다. 한국에서는 아직 갑질을 처벌할 수 있는 법이 없기 때문에 땅콩회항사건은 ‘항공안전위반법’으로, 양 회장은 ‘상습폭행죄’로 기소되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물론 이 같은 일탈행위는 과거 노예제나 봉건사회에서는 전혀 문제될 수 없었다. 노예나 농노는 생살여탈권을 쥔 주인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물건이나 마찬가지였지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취급되지 않았다. 중세 봉건사회와 절대왕정체제가 해체되고 시민계급이 등장하면서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고발하는 문학작품들도 많이 나타났다. 대표적인 것으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디드로의 <숙명주의자 자콥과 그의 주인>이 있다.
특히 디드로의 소설은 철학자 헤겔이 <정신현상학> 속에서 ‘자의식’의 문제를 설명하면서 다룬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논증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논거를 제공했다. 주인이 노예를 자립적인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만일 그가 이를 인정하면 자신을 부정하는 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 동시에 노예는 절대적인 존재인 주인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기에 주인과 노예는 상호의존 속에서 자의식을 구성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양 회장이 사무실에서 부하직원을 구타하는 장면을 담은 짧은 동영상을 보았다. 동료가 폭행당하는데도 묵묵히 계속 일하는 여러 직원들의 모습이 오랫동안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갑질이 벌어지는 공간에서 등장인물들의 여러 행태를 보면서 나는 주종관계를 둘러싼 철학적 논쟁을 떠올렸다.
마르크스가 압제에 저항하는 상징적 인물로 평가했던, 로마시대에 노예의 반란을 이끌었던 스파르타쿠스가 있었다. 우리 역사에는 “장군과 재상이 어찌 타고난 씨가 따로 있겠는가? 때만 만나면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라고 어찌 뼈빠지게 일만 하고 채찍 아래에서 고통만 당하겠는가”라고 외치며 사노(私奴)의 봉기를 이끌었던 고려말의 만적(萬積)이 있었다. 노예가 자신의 해방을 위해 억압적 지배구조를 뒤엎으려 한 생사를 건 투쟁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하다는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해 주종관계를 역전시켜 노예가 주인이 되어도 갈등은 그대로 남는다는 비판이 있다. 예를 들면 니체는 노예와 주인을 선과 악의 대칭관계 안에서만 보는 ‘복수심(復讐心)’은 ‘노예의 도덕’을 낳을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대신에 그는 선악의 경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초인(超人)이 지닐 수 있는 고귀한 ‘주인의 도덕’을 설파했다. 그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복수심은 침묵, 망각하지 않고 기다리기, 일시적으로 자신을 낮추거나 위선적인 겸손을 수단으로 해서 권력에의 의지를 불태우지만 이는 ‘영혼의 자기독살’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가시가 많은 장작 위에 자리를 펴고 자면서 복수를 준비한 부차(夫差), 그리고 침상 옆에 쓸개를 매달아 놓고 매일 핥으면서 쓴맛을 되씹고 복수의 칼을 갈았다는 구천(句踐)의 이야기를 담은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성어가 있다. 노예의 도덕을 비판했던 니체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인용할 수도 있었던 고사처럼 느껴진다.
끝으로 주인과 노예 사이에 새로운 관계설정을 아예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이 있다. 주종관계는 도저히 극복될 수 없는 인간세계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 비록 불행한 일이지만 어찌할 수 없다는 견해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풀 메탈 재킷(Full Metal Jacket)>이 있다. 베트남전선으로 떠나기 전날 밤, 해병대의 훈련소에서 신병 로렌스는 그에게 갑질을 했던 교관을 사살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었다. 갑질을 이겨낸 그의 친구 조커는 베트남전선에 투입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전우들과 본국으로 후송되는 차 안에서 그가 불렀던 노래는 그러나 우렁찬 군가가 아니라 어릴 적에 불렀던 ‘미키 마우스 노래’였다. 불행한 의식과 체념, 그리고 이것마저도 잊으려는 안타까운 노력을 보여주었다.
복수심, 선악의 피안에 선 주인의 고상한 도덕 그리고 숙명주의에 기반한 해석과는 달리 주종관계를 정신병리학적인 관점에서도 고찰할 수 있다. 동영상 속의 폭력적인 양 회장이나 영화 속의 괴롭히는 교관을 인구의 약 2%를 차지하는 자기과시욕이 강한 히스테리성 인격장애자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로렌스나 동료의 폭행을 외면한 사원들을 인구의 약 3~5%에 속하는 자신감의 결여라는, 또 다른 인격장애자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방식은 현재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갑질의 총체적 맥락을 좇는 초점을 흐리게 만든다.
돈과 권력이 사회적으로 인정(認定)받을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지만 교육과 교양을 포함하는 ‘문화적 자본’, 그리고 사회적 연대성을 의미하는 ‘사회적 자본’을 고려에 넣지 않는 인정논의의 한계는 분명하다. 반세기 동안 압축성장이라는 외길을 달려온 한국 사회가 낳은 무한경쟁은 갑질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벼락부자가 누리는 오만한 성취감, 반대로 갑질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는 무력감과 복수심만을 안겨주었다. 이 둘 사이의 간격이 너무나도 크다. 이를 극복하려는 엄청난 노력 없이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는 꿈 같은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지금 일고 있는 갑질을 둘러싼 논쟁이 한국 사회가 스스로를 돌아보는 하나의 계기가 되어 사회변혁을 위한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일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설]강화된 가정폭력 대책, 실행이 중요하다 (0) | 2018.11.29 |
---|---|
[기고]일자리 기회, 농어업에서 찾자 (0) | 2018.11.27 |
[전우용의 우리시대]평화 염원의 시대 (0) | 2018.11.27 |
[속담말ㅆ·미]굽은 지팡이 그림자도 굽어 보인다 (0) | 2018.11.27 |
[사설]KT 화재, 근본 대처 못하면 더 큰 재앙 맞는다는 각오로 (0) | 2018.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