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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시대의 창]운명의 날

opinionX 2016. 12. 12. 11:30

오늘은 대한민국 운명의 날이다.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 표결에 부쳐진다. 만약 이 안이 가결되고 장차 헌법재판소를 통과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최초의 탄핵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실로 오랜만에 우리나라에서 정의가 승리하는 장면을 국민이 목격하게 된다. 세월호 유족들은 먼저 간 자식을 생각하며 눈물 흘릴 것이다. 토요일 촛불집회에서는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의 실현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 뒤 정국이 어디로 흘러갈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형국이 될 수밖에 없다. 조기 대선이 현실화하면서 여러 후보가 대선의 급류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은 불문가지다. 개헌 주장도 더러 나오겠지만 현 국면에서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에 불과하다. 지금은 오직 탄핵과 정권교체뿐이다. 박 대통령을 포함하여 개헌파 중에는 속셈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많으므로 양두구육이 아닌지 잘 봐야 한다. 경기 전날 갑자기 경기규칙을 바꾸자고 하는 사람은 저의를 의심할 만하다.

물론 현재 헌법에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걸 고치는 것은 차후 과제다. 이번 국정농단 사태에서 드러난 우리 사회의 적폐를 해소할 철저한 개혁을 단행하는 것이 다음 대통령의 임무다. 다음 대통령이 재벌개혁, 사법개혁, 관료개혁, 교육개혁, 언론개혁 등을 완수한 뒤 임기 후반에 가서 개헌을 논의하는 게 순서라고 본다. 그때 가서는 대통령중심제냐 의회중심제냐, 비례대표를 얼마나 늘릴까,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할까 등을 포함해 백가쟁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은 개헌을 논할 때가 아니다.

그런데 만일 탄핵안이 부결되면 그 이후 정국은 먹구름 속으로 빠져들어 한 치가 아니라 반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된다. 탄핵안 통과에 실패한 야당 국회의원들은 ‘내가 이러려고 국회의원 했나’라는 자괴감에 빠져 집단 사표를 던질 것이다. 지금까지 사상 유례 없는 평화시위로 세계의 찬탄을 받았던 시민들도 참을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성난 촛불은 민의를 배반한 국회와 새누리당사를 에워싸 국회를 마비시킬 것이고, 국정 혼란은 극에 달할 것이다. 대통령과 국회의 기능이 마비된 나라가 어떤 모양일지는 전대미문이라 도저히 상상하기 어렵다.

탄핵은 찬성하는 게 옳은가? 백번 옳다. 대통령의 헌법 파괴, 범법 행위는 현재 밝혀진 것만 해도 차고 넘친다. 세월호 7시간만 해도 여러 의혹에 대해 부인만 하지 그 시간에 대통령이 뭘 했는지 왜 말하지 않는가. 결국 최태민, 최순실은 박정희의 유신독재 그늘에 똬리 튼 독버섯이다. 이번 국정농단은 박정희, 최태민을 극복하지 못한 박근혜의 왜곡된 역사인식이 빚은 사태다. 아버지 미화를 목적으로 하는 한국사 국정교과서는 폐기하고, 백해무익한 사드는 없애고, 자존심 상하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위안부 합의는 폐지하고, 억울하게 문 닫은 개성공단은 다시 열어야 한다. 박정희 독재의 망령에 빌붙어 호가호위하며 법 위에 군림해온 간신배들은 심판해야 한다.

무엇보다 성실하고 정직한 소시민들, 촛불집회가 끝나면 열심히 거리를 청소하는 애국시민들이 자존심을 갖고 어깨 펴고 살아가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온 세계에 대통령이 떨어뜨린 국격을 국민이 회복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오늘 결정되니 오늘은 진정 운명의 날이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이 운명의 결정은 국정농단의 공범인 새누리당 의원들의 손에 달려 있다. 골수 ‘진박’은 개전의 정이 없으므로 눈곱만큼도 기대할 게 없다. 어차피 이 사람들은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받고, 정계에서 쫓겨날 운명이다.

반대로 새누리당을 탈당해서 대통령 탄핵을 열심히 외치는 남경필, 김용태의 주장에 비박, 친박은 귀를 기울여야 한다. 새누리당에 마지막 남은 양심과 애국심이 있다면 당연히 압도적 국민이 요구하는 탄핵 대열에 동참해야 한다. 무자격 대통령을 내세워 국민과 역사 앞에 지은 죄를 속죄할 마지막 기회가 오늘이다. 잘못을 회개하고 새 출발을 하려는 사람은 용서하자.

독일의 나치 정권은 작곡가 ‘막스 브루흐’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그의 모든 음악 연주를 금지했다. 브루흐가 작곡한 ‘콜 니드라이’도 물론 금지당했다. 콜 니드라이는 ‘신의 날’이란 뜻인데, 이 노래에 의해 인간은 과거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고 한다. 이 곡은 속죄의 날을 기리는 관현악 반주의 첼로곡으로, 장중하게 흐르는 동양적 비애의 멜로디가 듣는 이의 가슴을 적신다. 오늘 운명의 날이 속죄의 날이 되기를 빈다.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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