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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래 | 단국대 교수·도시계획학


7년간 3조5000억원이 투자될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과학벨트) 조성을 위한 특별법이 지난해 국회 날치기 때 통과됐다. 법에 의하면 과학벨트의 위치는 과학기술위원회 주관으로 정하도록 되어 있다. 청와대 담당자는 전국이 입지 후보지라고 했고 여당의 유력인사는 정치적 입김을 줄이고 정부에 선정을 맡기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과학벨트 문제는 ‘제2 세종시 사태’로 치닫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과학벨트가 충청권에 들어설 것으로 알고 있다. 대통령이 ‘충청권 입지’ 약속은 물론 유령도시가 될 세종시를 구할 처방으로 일찍이 제안했기 때문이다. 세종시 수정안은 부결됐지만, 그래서 충청권 약속을 지킬 것이란 게 보통사람들의 기대였다.

그러나 세종시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렸듯이 현 정부는 과학벨트 약속도 없었던 것으로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러면서 과학의 미래와 국익을 고려해 입지가 선정돼야 한다는 무책임한 말만 던져 놓고 있다. 보수언론들은 과학계에 맡겨 투명한 절차를 통해 정하자는 예의 추렴을 넣고 있다.

과학벨트는 첨단과학시설을 담는 곳이다. 그 속의 활동은 과학자의 몫이지만 입지 선정과 조성은 도시계획가의 몫이다. 따라서 과학계에 맡겨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선정하자는 것은 일견 그럴듯하지만 속보이는 짓이다.

더욱 입지 선정이 새로운 게 아니다. 대통령 공약과 세종시 원안 논쟁을 통해 ‘충청권 입지’에 관한 기억과 기록이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 모두를 망각하고 새로 하자는 것은 고도의 정치적 기만일 뿐이다. 입지 평가만 하더라도 정부는 2년 전 국토연구원을 통해 과학적 방식으로 실시했고 세종시가 최고 입지라고 낯뜨거울 정도로 선전했다. 물론 정부부처가 가는 대신 과학벨트를 넣는 게 더 낫다는 세종시 수정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임은 다 아는 사실이다. 정부는 그래서 정부안 부결로 과학벨트의 세종시 입지가 백지화됐다는 핑계를 들어 입지 선정 재실시를 강변한다. 하지만 이는 감정적인 이유일 뿐 합리적 사유가 결코 못 된다.

                          대덕특구 내 대덕특구인쇄출판산업단지추진조합 등의 노조원들이 최근 정부대전청사 앞에서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의 충청권 입지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 대전시 제공


원안에 따라 12부9처9청이 이전하면 세종시의 과학벨트 입지 여건은 좋아져도 한참 더 좋아지게 된다. 세종시에는 과학벨트를 세울 수 있는 첨단지식기반지구 360만㎡가 이미 확보돼 있고 중이온가속기 설치에 필요한 지질 안정성도 입증돼 있다. 여기에 정부기관들이 들어오면서 갖추어질 교육, 의료, 문화, 국제교류의 서비스 인프라는 과학벨트에 필요한 최고의 입지 환경이 된다. 원안에서 2015~2020년은 자족성숙단계인 만큼 의지만 있다면 현 정부는 과학벨트를 주력사업으로 해 세종시를 멋지게 마무리할 수 있다.

세종시에다 과학벨트를 넣는 것은 이명박식 세종시 원안이다. 후보시절 이 대통령은 ‘세종시의 자족능력 강화를 위해 세계적 국제과학기업도시 기능을 더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행정도시, 대덕연구단지, 오송생명과학단지 등 과학도시 트라이앵글을 형성해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심장부를 만들겠다’고도 했다. ‘세종시+과학벨트’는 이렇듯 이 대통령이 만든 충청권 맞춤형 개념이다. 수정안 좌절로 원안으로 돌아간다면 ‘세종시+과학벨트’가 이 정부의 원안이다.

정치적 논리를 버리고 다시 선정하자는 주장은 과학의 미래를 앞세운 저열한 정치적 꼼수로 세종시를 두 번 죽이는 처사다. 과학은 지혜와 정직에 기반한다. 술수와 기만에 기반한 과학벨트는 어느 곳에나 세워질 수 있다. 그러나 그곳엔 과학다움이 없고 과학벨트를 통해 열려는 과학의 미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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