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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시론]‘책맹’들의 착각

opinionX 2014. 10. 28. 21:00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선선하다. 이제 완연한 가을인 듯싶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말들 중에 독서의 계절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 표현에 따르면 가을은 책 읽기에 좋은 계절이고, 따라서 여느 계절보다 많은 이들이 책을 가까이하며 지낼 것 같다. 하지만 가을에 오히려 책 판매량이 줄어든다는 서점가 통계가 말해주듯이 가을이라고 해서 책 읽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책 읽는 이들의 수는 매년 줄어들고 있다. 2013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서도 우리나라 성인의 독서량은 9.2권으로, 2011년에 비해 0.7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책 읽는 이들의 수는 줄어드는 것일까? 나날이 발전하는 디지털 기술에서 원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태블릿PC 등의 등장으로 굳이 책이 아니어도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지적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무게와 부피를 가진 책을 들고 다니는 행위는 수고이자 불편이며 낭비가 되어버린다. 심지어 독서인구의 감소현상은 하나의 진보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만일 책이 단순히 정보매체라면, 그래서 책을 읽는다는 것이 정보의 입수와 동일한 의미라면 위 설명방식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책을 읽는다는 것과 디지털 기기를 통한 정보입수 행위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독서는 정보입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다 확장된 경험이고, 고유한 경험이며, 따라서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다.

한 북카페에서 독서에 푹 빠진 사람들 (출처 : 경향DB)


책의 물질성을 오감으로 느끼는 독서는 디지털 기술에 의해 대체할 수 없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서점을 찾고, 다양한 표정의 책들을 살피고, 시선을 사로잡는 책을 만나며, 그 책의 무게와 질감을 느끼고, 보다 깊은 만남에 대한 기대와 함께 책을 사서 나오는 길은 결코 무의미한 수고이거나 고통이 아니다. 지하철이나 카페에 앉아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일, 인상적인 글귀에 밑줄을 긋거나 페이지를 접는 행위, 다 읽은 책을 뿌듯함과 함께 책장에 꽂아 놓는 일, 그리고 꼽힌 책 등을 보며 간간이 내용을 떠올리는 일이 어떻게 무의미한 낭비일 수 있겠는가?

언제부턴가 책과 관련하여 어떤 착각이 우리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착각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착각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책을 못 읽는 것이 아니라 안 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만 책을 안 읽는 사람들은 사실 책을 못 읽는 것일 확률이 높다. 대학 진학률이 80%를 오르내리는 시대, 문맹이 퇴치된 이 시대의 역설이기도 하지만, 글을 읽을 수 있다고 해서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글을 읽을 수 있는 능력과 함께 책을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책이 등장한 이래 어느 시대나 책을 읽을 수 있었던 이들이 있었고, 동시에 책을 읽을 수 없는 이들도 있었다. 역사의 상당 시간 동안 책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은 문자를 아는 능력과 동일시되어 왔다. 하지만 문맹이 사라지면서 비로소 책 읽는 능력과 문자를 해독하는 능력이 다른 것임이 드러나고 있다. 바로 책맹들을 통해서 말이다. 책맹이란 책을 읽을 수 있으나 읽지 않는 이들이 아니라, 책을 읽지 못하는 이들을 지칭한다. 이 시대는 바로 그러한 능력을 상실한 책맹들의 시대인 것이다.

오늘날 책을 읽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독서 인구의 감소는 당연하거나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진보의 표지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책 읽기와 디지털 기기를 통한 정보입수를 하나의 발전단계에 놓고 책을 낡은 매체라고 부추기는 움직임의 산물이다. 독서보다는 스마트폰과 웹서핑을 즐기고, 그러한 변화를 발전과 진보로 바라보는 시각의 산물이다. 무엇보다 책 읽는 능력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든 책을 읽을 수 있다고 여전히 자신하는 책맹들의 착각이 만들어낸 결과인 것이다.


오창섭 | 건국대 교수·디자인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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