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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점을 봤다. 연초가 되면 으레 봤었는데 2009년 그 사건이 있고 나선 좀체 보지 않던 점이다. 아들이 구속되면 어찌하느냐며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 묻고 또 물었다. 어느 점집에선 구속되지 않을 테니 걱정 말라고 했고 또 어떤 ‘점바치’는 구속된다고 했다. 결국 아들은 구속됐다. 그 뒤론 발길 끊었던 점집을 이번에 다시 찾았다.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 대법원 선고를 앞둔 며칠 전 일이다. 결과를 말해주지 않아 몰랐는데 희망이 별로 없었나 보다. 수화기를 타고 넘어 오는 목소리가 마른 나뭇가지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지난 11월13일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무효 소송에서 지고 말았다. 대법원은 서울고법이 쌍용차 정리해고 무효를 판결했던 사건을 뒤집어 파기하고 서울고법으로 돌려 보냈다. 6년의 시간동안 쥐고 있던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데는 20초면 충분했다. 법정 공방이 사실상 일단락되는 순간이었다.

대법원은 6년 전, 2009년 6월8일에 벌어진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해고회피 노력 또한 충분했다며 파기 환송했다. 회사의 유동성 위기 주장을 받아들였고 유형자산손상차손도 과다계상되었다고 판단한 서울고법의 판결문을 뒤집었다. 3000명에 가까운 대량의 정리해고 규모도 합리적이라고 했다. 대법원은 법률심 즉 법률 적용의 타당성 여부를 다투는 곳이다. 그러나 사실심인 서울고법에서 인정한 사실을 뒤집는 월권을 행사했다.

소위 쌍용차 경영위기는 2008년에 발생한 금융위기와 유럽 환경규제 그리고 경유가격 인상이라는 일시적 원인임에도 구조적 위기라는 회사 측 주장을 그대로 받아 읽었다. 정리해고가 아닌 근로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로 넘길 수 있는 위기였지만 대법원은 다르게 봤다. 산출 근거도 밝히지 않은 대량의 정리해고 규모도 적절하고 잘한 일이라며 회사 머리를 쓰다듬어준 것이다.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한 쌍용 노동자 (출처 : 경향DB)


이번 대법원 판결로 ‘정리해고’ 사건에서만큼은 자본에는 신세계가 선물로 주어졌고 노동자에겐 무간지옥이 안겨졌다. 이미 곤죽이 돼버린 노동시장을 더 어떻게 유연화할 수 있고 누구를 위한 유연화란 말인가. 정리해고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한국 노동시장의 불안을 어디까지 밀어붙일 텐가. 빈껍데기란 지적에 시달리는 근로기준법이지만 적어도 정리해고 요건은 못 박고 있었다. 이마저도 이번 판결로 마지막 빗장이 풀린 것이다.

쌍용차 재판을 담당한 대법관은 소수자 목소리를 대변하라는 취지로 임명된 분이다. 그 소수가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자본의 목소리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은 쌍용차 해고자들이 이러한 비참함과 만났지만 내일은 또 다른 선한 이들이 이 비극적인 참담함을 만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법원이 다양성을 포기하고 정치 일색으로 ‘깔맞춤’하는 오늘의 현실이 극복되어야 하는 이유다.

대법원이 쌍용차 해고자들의 고름 같았던 시간의 종결자 구실을 포기하고 완충지대 없는 허허벌판으로 떠밀었다. 겨우 옷가지 하나 나뭇가지에 걸린 채 벼랑 끝에 매달려 살던 이들에게 그 작은 나무조차 뽑아버렸다. 추락은 다시 시작됐고 바닥을 짐작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친 마음에 포기하고 싶은 오늘이지만, 자판이 흐리게 보이고 엄마를 붙들고 소리 내어 울고 싶은 오늘이지만, 비탄의 시간 속에 무릎 꺾이고 심장이 타들어가 주저앉고 싶은 오늘이지만, 그런 개 같은 날이 오늘이지만, 이대로 이 모진 시간이 사람들 기억에서 삭아 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목구멍이 막히는 오늘이지만,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자리에 서 있지 못하는 한, 그날이 오늘은 아니다.


이창근 | 쌍용차 해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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