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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시론]단식의 정치학

opinionX 2014. 9. 1. 21:00

2만5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단식을 하겠다고 나섰다. 450만명이나 되는 국민이 세월호특별법 제정에 서명했다. 두 아이의 평범한 아버지, 유민 아빠 김영오씨의 장기간 단식으로 촉발된 국민 동조 단식은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

김영오씨와 고통을 함께해야 한다는 공감 속에서 시작된 동조 단식은 이제 종교계와 예술계, 정치인, 시민사회단체를 넘어서 일반인들까지 확산되고 있다. 죽기를 각오하고 세월호특별법을 제정하라는 동조 단식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왜 이러한 단식투쟁이 군사독재시절도 아닌데, 박근혜 정부에서 확산되고 있는 것일까.

정치적 저항으로서의 단식은 극한상황에 처해 있을 때 나타났다. 영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18회나 단식투쟁을 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감옥 안에서 죄수들의 인권투쟁을 위해서 단식을 했다고 하는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 전 대통령. 1905년 일본군에게 압송돼 대마도에서 곡기를 끊고 죽을 때까지 항일의병 전사로 남은 최익현, 그는 임금이 보낸 마실 물도 거절하고 선비로서의 죽음을 택했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죄인이 무슨 낯으로 나라의 물을 마실 수 있겠느냐”며 망국의 분노와 수치심을 단식으로 대신했다.

서슬 퍼렇던 1983년 전두환 정권 시절, 가택연금 등으로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던 YS(김영삼 전 대통령)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회복하기 위해 23일 동안 단식을 감행, 민주화 정치 투사로서의 재기에 성공했다. 평민당 총재였던 DJ(김대중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여권의 보수세력이 총집결, 소수 야당의 존재감이 흔들리고 있을 때였다. DJ는 13일간의 단식을 통해 보수대연합의 내각제 개헌 의도를 막아내고 지방자치제 실현까지, 야당으로서의 평민당 지위를 확실하게 받아냈다. 1970, 1980년대 암울한 시절, 폭압적인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기 위한 투쟁으로 단식을 선택했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죽음으로 저항 의사를 표시했다.

정치적 저항운동으로서의 단식, 그것은 자신이 단식으로 내건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는다면 죽겠다는 극단의 정치적 의사표시이다. YS는 자신의 회상에서 “의사와 간호사들도 죽어가는 몸에서 나오는 악취로 가득 찬 방에 들어오기를 꺼려 하는 것 같았다”고 밝혔다.

그런데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시대가 된 지 30여년이 가까워지고 있는데, 정치인들이 아닌 일반 시민들이 릴레이 단식을 하고 있다. 그것도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여당에 세월호특별법을 제대로 제정하라고 요구하면서 곡기를 끊고 있다.

수사권과 기소권이 포함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46일째 단식농성을 이어온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8월 28일 단식을 중단한 후 첫 식사인 미음을 먹고 있다. 이날 김영오씨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단식은 배부른 강자들이 할 이유가 없다. 힘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사회적 약자들의 마지막 수단이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 단식을 했던 정치인과 사회운동가들은 더 이상 호소할 방법을 현실 정치에서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말 죽을지도 모르는 단식을 택했다. 지금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이 단식을 하고 있다는 것은 박근혜 정부에 통할 수 있는 수단이 단식밖에 없다는, 불통의 시대, 절망의 정치현실을 웅변하는 것이다.

정치가 갈등과 대립을 풀어내야 한다고, 약자들을 위해서 그 대변자 노릇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은 해묵은 정치학자들의 하소연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지 1년반이 지났다. 19대 국회가 출범한 지도 2년여가 훌쩍 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식 잃은 부모들의 절규로, 한사람 한사람 생명의 소중함으로 이어가고 있는 단식 행렬을 때로는 방관자로, 어떨 때는 정치 흥정의 대상으로 치부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동조 단식이 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절망과 분노의 처참한 정치현실을 곡기를 함께 끊어서 희망을 만들어 보자고 하는 것 같다. 힘들고 희망 없는 정치현실이다. 단식의 정치학, 그것은 우리의 정치현실이 무능하고 무력하다 못해, 나쁜 정치인들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게 한다. 단식의 정치학으로 세월호 정국이 풀리지 않는다면, 과연 어떤 정치해법이 들어설까. 더 두렵고 폭력적인 정치해법이 등장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유용화 | 시사평론가·동국대 대외교류硏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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