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박근혜 대통령이 촛불에도 막무가내로 버티는 것은 과도한 권력욕 때문인가. 납득할 수 없다. 아무리 권력욕이 강해도 이토록 몰상식하고 몰염치하고 비양심적일 수는 없다. 분명 권력을 통해서만 획득 가능한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대통령 권력마저 수단으로 삼는 그 무언가가 비밀의 열쇠다.

박 대통령이 국정에서 결코 양보하지 않는 3가지가 있다. 경제성장, 대북강경론, 그리고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대통령에게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뭘 선택할지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그는 박정희의 딸일 뿐 아니라 정치적 후계자다. 박정희가 아프면 대통령도 아프다. 대통령은 영원히 아프지 않을 수 있는 수단을 교육에서 구했다. 바로 중·고교 국정 역사교과서다.

고교 한국사 검토본을 보면 무려 9쪽에 걸쳐 박정희를 다루고 있다. 5000년 역사를 다룬 교과서 전체 분량이 293쪽이니, 과도하다는 표현이 무색하다. 반면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서술은 4명 모두 합해 0.5쪽에 불과하다. 박정희 이름은 23회나 언급하면서 다른 대통령은 평균 2~3회만 언급한 것도 말이 안된다. ‘효도교과서’가 아니라 ‘박정희 위인전’ 수준이다. 진짜 위인들과 비교해도 터무니없기는 마찬가지다. ‘성웅’ 이순신 서술은 2쪽, ‘대왕’ 세종은 1쪽이다. 안중근 의사와 류관순 열사는 각각 단 두 문장이다. 박정희는 역사 속 위인 모두를 합한 것보다 더 걸출한 위인인 셈이다.

11월 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한국사국정화저지네트워크’ 회원들이 열을 지어 국정 역사교과서 폐기를 주장하는 패널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내용은 훨씬 더 심각하다. 박정희는 사회 모순과 가난을 타파하고 산업화, 선진화를 이끈 인물로 그려진다. 5·16쿠데타 단원은 쿠데타의 동기와 명분을 평가 없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역사교과서가 아니라 홍보물을 연상시킨다. ‘유신헌법과 중화학공업 육성’이란 단원 제목에서는 왜곡의 냄새가 풍긴다.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탄압의 원흉인 유신체제를 마치 중화학공업을 육성시킨 원천으로 오해하도록 교묘히 조작한 것이다. 박 대통령이 한국사를 수능 과목에 포함시킨 것은 박정희 우상화를 위한 역사조작의 마지막 한 수다. 학생들이 교과서를 달달 외우고, 박정희=절세의 위인이란 공식을 뇌리에 각인시키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사실 박정희 위인 만들기는 국정교과서가 처음이 아니다. 경북 구미시에서는 매년 ‘탄신제’가 열리고, 생가에는 5m 높이 동상이 세워졌다. 기념박물관, 체육관이 건립되고 박정희 이름을 딴 소나무와 등굣길, 밥상, 곶감이 탄생했다. 구미시장은 박정희에 대해 “하늘이 내린 반인반신”이라며 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서울 광화문에 동상을 세우겠다는 추모단체도 나타났다. 이 정부 들어 박정희 관련 사업 투입 예산은 3000억원이 넘는다. 박정희 띄우기는 파생상품도 만들어낸다. 박 대통령이 최대 수혜자다. 울산시가 지난 여름휴가 때 다녀간 박 대통령의 산책코스에 ‘대통령님이 걸으신 곳’이라고 안내문을 설치한 게 대표적이다. 그를 다룬 책에는 “진짜 거인” “선덕여왕의 화신”이란 표현이 넘쳐난다.

지자체와 일부 시민사회, 출판계의 박정희 부녀 띄우기는 북한의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우상화를 연상시킨다. 북한에서는 곳곳에 동상을 세우고 화재가 나면 가족보다 김일성·김정일 초상화부터 먼저 챙기는 코미디가 연출된다. 함경남도 신포의 이준 열사 생가 마당에는 ‘김정일 장군님 발자국’까지 보존하고 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촌극이 남한에서 현실화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지금 촛불 시민은 국정농단만이 아니라 박정희 망령과도 맞선 거대한 역사전쟁을 하고 있는 셈이다. 민주주의와 인권, 국가와 시민의 현재와 미래가 걸린 중대한 싸움이다. 절대 져서도, 질 수도 없다.

대통령에게 촛불은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원망스러운 존재일 게 틀림없다. 내년 박정희 탄생 100주년에 맞춰 교과서를 만들고 현장 배포를 코앞에 둔 지금 갑자기 나타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촛불에 밀려 자칫 불명예 퇴진이라도 당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국정교과서가 폐기되면 머리카락 빠진 삼손 꼴을 면할 수 없다. 대통령 입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만은 막아야 한다. 그러자면 가장 필요한 것이 시간이다. 최소한 교과서가 폐기되지 않도록 방안을 만들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해는 이미 저물었다.

그제 사상 최대 230만 촛불은 대통령을 오갈 데 없는 구석으로 몰았다. 잔꾀와 말장난으로 버티지 말고 당장 물러날 것을 명령했다. 이게 정답이다. 파탄난 국정을 정상화하고, 나라 전역에 그림자를 드리운 박정희 망령을 걷어내는 길은 하나다.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정치를 한다”는 박 대통령의 정치생명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조호연 논설위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