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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여적]쪽지예산

opinionX 2016. 12. 6. 11:17

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인 2012년 12월31일 국회 예산결산특위 예산안조정소위 회의장. 지역구 의원들이 A4 용지에 지역사업명과 예산액 등을 적은 뒤 3~4번 접은 쪽지를 회의장 안으로 끊임없이 밀어넣었다. 이른바 ‘쪽지예산’이었다. 당시 새누리당과 민주당 예결위 간사가 5일간 머리를 맞댄 국회 정문 건너편 렉싱턴 호텔에도 쪽지예산이 쇄도했다.

예년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쪽지예산 탓에 2013년도 예산안은 “새해 회계연도 개시(1월1일) 전까지 처리해야 한다”는 규정을 어긴 채 해를 넘겨 처리됐다. 1963년 예산안 제도가 도입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쪽지예산으로 당시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는 635억원, 이한구 원내대표는 272억원을 따냈다.

이명박 정부 초기엔 이상득 전 의원의 ‘형님예산’이 도마에 올랐다. 2008년부터 날치기로 예산안을 통과시키면서 3년간 1조원이 넘는 예산을 챙겼다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비판 여론이 들끓자 여야는 쪽지예산을 없애겠다고 했지만 말뿐이었다. 최근에는 쪽지 대신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나 카카오톡 등 모바일 메신저를 활용하는 ‘문자예산’ ‘SNS예산’이란 신조어까지 생겼다.

2017년 국회 통과 예산, 주요 국회 증액 내용, 분야별 예산 증감내역 (출처: 경향신문 DB)

올해도 비선 실세 최순실 관련 예산 1800억원이 깎이는 바람에 쪽지예산이 기승을 부렸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대통령 탄핵 문제로 국정이 혼란스러운 상황이고, 기획재정부가 쪽지예산을 제출하면 ‘부정청탁금지법(김영란법)’ 위반으로 신고하겠다고 했는데도 쪽지예산 파티가 벌어졌다. 의원들이 예산심의 과정에서 증액을 요청한 사업은 4000여건, 금액은 내년도 예산의 10분의 1 수준인 40조원에 이른다. 특히 여권 실세 의원들의 ‘잇속 챙기기’는 극에 달했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는 최소 50억원, 정진석 원내대표는 48억원, 김광림 정책위의장은 60억원을 새로 증액시켰다. 야당에선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최소 13억원,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47억원을 지역구 예산에 반영했다.

쪽지예산은 나라살림을 부실하게 만드는 퇴행적 관행이다. 나라살림이야 어찌 되든지 지역 포퓰리즘에 기대 표만 생각하는 이들에게 ‘부실 의원’이란 쪽지를 전달해야 하지 않을까.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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