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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민주시민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낸 역사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헌법 제1조는 규정하고 있지만, 건국 이후 오랜 기간 이 규정은 독재자들의 칼날 앞에 무력했다. 독재자의 하수인으로 그 칼자루를 들고 설친 것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 정보기관이었다. 중앙정보부를 필두로 이름만 바꾸어온 이 정보기관은 선거 때마다 정치공작을 감행함으로써 주권자인 국민을 모독했다. 민주화의 성과로 이런 범죄행위는 사라진 듯했으나 2012년 국정원은 인터넷 강국 대한민국의 기술 수준에 맞는 역사적 사건을 일으켰다.

지난주 목요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는 국정원 댓글사건의 판결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검찰이 기소한 여러 범죄사실을 증거불충분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204쪽이나 되는 방대한 판결문 곳곳에 국정원이 현실정치에 개입하여 국민의 여론 형성을 어떻게 왜곡했는지를 보여주었다. 재판부는 대통령 선거 시기 국정원 직원들이 정부의 정책이나 국정 성과 등을 홍보하는 댓글과 대선 후보자와 소속 정당에 대한 반대·비방 취지의 글을 상당수 작성하여 사이버 공간에 게시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원세훈 전 원장을 비롯한 피고인들에게 국정원법 위반으로 유죄를 인정했을 뿐 공직선거법 위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은 결과적으로 정권의 정통성에는 일조하였지만 사법정의의 외피를 쓴 정치판결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선거 시기에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인정하였다면 공직선거법상 금지되어 있는 공무원의 지위를 이용한 선거개입이라고 보는 것이 법률가의 경험칙과 국민 일반의 법 상식에 부합한다. 선거 국면에서 국정원이 여당에 유리하고, 야당에 불리한 정치댓글 작업을 조직적으로 한 것이 밝혀졌다면, 그것을 여당 후보자를 위한 비밀 선거운동 외에, 달리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백보를 양보하여 국정원법에 의한 정치개입만 유죄를 인정한다고 해도 피고인들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은 전형적인 솜방망이 처벌이다. “국가기관이 특정한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국민들의 자유로운 여론 형성과정에 직접 개입하는 행위는 어떠한 명분을 들더라도 절대로 허용되어서는 아니된다.” “이 사건 범행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으로 그 죄책이 무겁다.” 이렇게 말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재판부 자신이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피고인들 전원이 법정 밖으로 유유히 걸어나가도록 했다. 국기문란의 주범이라 훈계하면서, 한편으론 이런저런 이유를 들먹이며, 선처에 선처를 한 것을 어느 누가 사법정의라 운운할 수 있을까.

취재진에 둘러쌓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 (출처 : 경향DB)


더 묵과하기 힘든 것은 재판부가 피고인들에게 공직선거법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또 다른 공직선거법 위반 가능성을 버젓이 거론했다는 점이다. 공직선거법이 공무원의 ‘선거개입 행위’와 ‘선거 또는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구별하여 규정했음에도, 검찰은 오로지 선거개입 행위만 기소했다. 재판부는 전자에 대해선 무죄를 선고하였지만, 후자의 경우는 공직선거법 위반을 인정할 여지가 있다고 하였다. 검찰은 주위적으로 주장하는 공소사실이 무죄가 될 경우를 대비하여 유죄가 될 수 있는 다른 법조 적용을 예비적으로 청구할 수 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공판이 종결될 때까지 그런 조치는 없었다. 검찰의 공소유지 의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이런 경우 재판부는 검찰로 하여금 적용 법조를 바꾸도록 요구할 수 있음에도 판결문에서 검찰에 훈수하는 정도로 그치고 말았다. 믿고 싶지 않지만 민주주의 유린사건에 대한 사법부의 단죄 의지는 고작 이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만일 이 판결이 그대로 확정된다면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조종을 울렸다는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항소심에서 이를 바로잡지 않을 경우 주권재민을 선언한 우리 헌법은 또다시 위기에 봉착할 것이다.


박찬운 |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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