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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혁명이었을까? 혹은 여전히 진행 중인 혁명일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촛불이 혁명인가 아닌가는 지금 중요한 일이 아닐뿐더러, 알 수도 없는 일이다.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고 이름 붙일 권리는 후대에 있다. 그것을 섣불리, 그것도 단숨에 해치우고자 하는 사람은 필시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위해 그것을 이용하려는 선동가이거나 재주를 뽐내고 싶은 용렬한 지식인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야기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1년 전, 이 나라는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사람들은 분노했고, 그래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지난 주말, 그 촛불의 기억을 되새기려는 많은 사람들이 다시 거리에 나왔다. 불과 1년 전에 이 나라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 망가진 나라를 정상으로 되돌린 것이 누구의 힘이었는지를 상기하고자 했다. 숨 막히는 세상에서 가슴속 응어리진 것들을 풀어낸 것이 촛불이었다면, 지금의 광장에는 적폐청산을 끝까지 마무리하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네들의 목소리는 작년만큼이나 우렁차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다짐만은 아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 요구 촛불집회 1주년을 맞은 28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 1주년 기념 '촛불파티'에서 촛불을 든 시민과 어린이 뒤로 국회가 보이고 있다. 28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촛불파티 2017’ 행사에서 어린이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권도현 기자

촛불로 가득 찬 광장은 해방의 공간이었다. 시민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주권의 소재를 재확인했고, 권력은 총칼이 아니라 주권을 가진 사람들의 공적 소통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러나 그 소통은 제한적이었다. 소통의 주제는 국가의 부재와 부패, 공적 권력의 사유화에 대한 비판과 그것의 회복에 대한 것이었다. 1987년 민주화의 목표가 ‘대통령 직선제’라는 최대공약수로 집결되었다면, 30년 뒤의 촛불은 ‘대통령 탄핵’으로 압축되었다. 왜 대통령이 탄핵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분노는 있었지만, 어쩌다 우리가 그 대통령을 뽑았는지에 대한 성찰은 드물었다.

그럴 수 있다. 분노로 광장에 모인 시민들에게 성찰을 요구하기는 어렵다. 지금은 다르다. 촛불을 기념하며 기쁨을 만끽하는 것만으로는 지금의 민주주의조차 오래 지킬 수 없을지 모른다. 프랑스 시민들은 1789년 혁명 이듬해에,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7월14일을 기념해 성대한 축제를 열었다. 그 혁명이 일어난 지 10년 뒤인 1799년,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손에 들어갔다. 황제의 독재를 무너뜨렸던 시민들은 불과 10년 만에 사실상의 새로운 황제를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물론 프랑스혁명 당시와 달리 우리에게는 헌법과 제도라고 하는 안전장치가 있다. 새로운 제도를 설계함으로써 우리는 보다 안정되게 정치의 발전을 꾀할 수 있다. 정부형태를 바꾸는 개헌이나 선거제도의 개정을 통해 정치개혁을 이루어나가려는 것은 분명히 의미 있는 시도다.

그러나 제도적 변화를 통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환상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이다. 쿠데타 방지법을 만든다고 쿠데타가 방지되지는 않으며, 국회선진화법을 만든다고 국회가 선진화되지는 않는다. 정치에는 정답이 없고, 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게 마련이다. 제도적 변화는 의사의 치료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을 때 제대로 효과를 발휘한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제도 자체에 옳고 그름이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제도적 변화에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특정한 방향성 정도다. 시민의 다수가 제도의 변화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면, 이러한 변화가 과연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지도 장담하기 어렵다. 시민들 모두가 정부형태나 선거제도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어떤 제도가 대체로 어떤 경향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건전하고 상대주의적 입장을 가진 지식인들과 언론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 정치개혁은 정치엘리트들 간의 담합이나, 자기 확신에 사로잡힌 엘리트들의 희생양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우리가 촛불을 되새기며 성찰해야 하는 지점은 단지 제도의 변화, 그 자체만은 아니다. 제도의 변화를 통해 정치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한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강력한 리더십으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을 찾는 그런 민주주의라면,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에게 차별성은 없다. 그때그때 선호하는 이념적 지향이 달랐을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뽑았던 시민들이 그 대통령을 탄핵했던 것처럼, 2017년의 촛불시민이 다른 얼굴을 한 박근혜를 뽑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책임이 보통선거권이나 대통령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권자에게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제도적 변화를 통해 지향하고자 하는 가치를 먼저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이관후 | 서강대 글로컬한국정치사상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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