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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사회의 통일 관련 논의에서 자주 등장하는 담론 중의 하나가 ‘문화’이다. 이는 주로 민간 차원의 문화교류를 통한 통일분위기 조성이나 통일 후 남북의 사회통합, 그리고 근래 부쩍 늘어난 탈북인들을 우리 사회에 제대로 정착하게 하는 다문화사회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전략적으로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물론 딱딱한 정치나 경제가 하기 어려운 일을 부드러운 문화를 통해 촉발하고 지속가능하게 한다는 구상 자체에 시비를 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식상하고 묘한 기시감을 주지 않나 반문하고 싶다.

민간 차원의 문화교류가 단절돼 있던 구성원 간의 이질적 정서의 가교역할을 할 것이라는 정부의 담론은, 마치 한류를 통해 국위를 선양하고 경제적 이익을 도모함은 물론 국가 정체성과 이미지를 고양하자는 ‘문화 없는 문화담론’과 유사하다. 바꿔 말해 홍보 전문가들의 판에 박은 듯한 국가브랜드나 문화외교 담론과 같이 협애하고 도구적이다. 나아가 그 효과를 측정하기도 쉽지 않고 또 통일의 주체 중 하나인 상대의 저항에 직면하게 될 개연성도 높다.

문화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로서 한 사회의 기득권과 계급구도를 영속화한다는 차원에서 부정적 일면을 지닌다. 동시에 사회의 소수자를 대변하며 거대 권력에 작은 틈을 내는 대항담론이나 하위문화로 기능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통일에 있어 문화의 역할과 관련된 논의는 전략적 발화, 즉 기능주의적이고 도식화된 홍보논리를 지양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문제를 용기 있게 직시하고 개선하는 데 온 힘을 모아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학계와 언론을 중심으로 공론화되고 성찰적 숙의를 통해 통일 후 더 좋은 국가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방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5주기를 하루 앞둔 17일 개성공단 종합지원센터 옆 북측 개성공단 총국사무소에서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겸 대남담당 비서와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김홍업 전 의원 등이 환담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출처 : 경향DB)


최근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정착한 탈북인들의 제3국으로의 탈남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는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남도 북도 아닌 제3의 세계를 선택하는 주인공을 떠올리게 한다. 동시에 한국사회에 관해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우리는 어쩌면 부조리한 일상에 무감각하거나 세월호 사고와 같은 비극적 인재들에 내성이 생겨, 한국사회가 교육과 구직, 노동과 복지 등에서 얼마나 취약하고 중층적 모순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위험사회’인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여 이를 한순간 의식하더라도 개선을 위한 의미 있는 실천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이것이 우리만의 문제인가라고 자위하지는 않았는지 반문해야 한다.

일례로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이제 현실에선 실현 불가능한, 즉 기표만 존재하는 사어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교육의 영역은 단지 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와 사회정의, 계층이동과 문화의 문제이기에 그 심각성이 크다. 지금처럼 교육이 부모의 부와 계층적 위계를 자녀에게 전승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고착화되거나, 교육을 통해 한 개인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극적으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차단되는 환경에서 통일 이후 남북한의 사회적 통합은 요원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기존의 낭만적이고 당위론적 통일담론을 넘어 우리 사회가 통일에 요구되는 사회문화적 역량을 갖추었는지, 나아가 구성원들이 긍지와 행복감을 느끼며 살 만한 사회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하고 답해야 할 때이다. 앞으로의 통일 논의는 기존의 판에 박은 문화교류나 다문화사회 등의 전략적 담론을 넘어 지난 몇 십 년 동안 신자유주의가 심화되며 한국사회에 뿌리내린 고질적 모순들을 치유하고 통일을 통해 보다 살기 좋고 품격 있는 사회로 도약하기 위한, 새로운 글로벌 스탠더드를 제시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류웅재 | 한양대 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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