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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시론]1987년과 2016년

opinionX 2016. 11. 15. 10:54

내년은 소위 ‘87년 체제’가 성립된 지 30년 되는 해이다. 30년은 꽤 긴 시간이다. 한국처럼 급변하는 공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많은 것이 크게 변했다. 단언컨대, 제왕적 대통령제, 독과점적 양당제, 지역주의와 결합된 소선거구 1위 대표제 등을 핵심으로 하는 ‘87년 승자독식 체제’로는 복잡해진 우리 사회의 중층적이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제대로 조정하고 관리해낼 수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 소상공인, 청년 등 규모가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적으로는 늘 약자일 수밖에 없는 이른바 ‘약대(弱大)집단’의 선호와 이익이 정치과정에 제대로 반영될 수 있도록 선거제도, 정당체계, 권력구조 등을 총체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 사회의 압도적 다수인 약자와 소수자의 정치적 대표성을 충분히 보장해주어야 그들에게 혜택이 두루 돌아갈 수 있는 경제의 민주화나 복지국가 건설도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개혁은 번번이 기득권층의 강고한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 특히 대통령과 집권당 주류세력의 반대는 아무도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었다.

박근혜·최순실 사태로 벌어진 작금의 위기상황은 정치개혁의 호기일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1987년 이후의 모든 대통령들이 임기 말이면 거의 어김없이 드러내 보이는 추태와 부패상의 구조적 원인은 바로 제왕적 대통령제를 필두로 하는 승자독식 체제이다. 따라서 차제에 한국 민주주의 체제의 일대 전환을 도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한 데 모이면,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 친박세력도 더 이상 반발하고 저항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30년 전의 대규모 시민항쟁이 독재체제를 민주체제로 바꾸어놓은 것처럼, 지금 벌어지고 있는 대규모 시민운동도 더 크고 더 좋은 민주주의 체제의 도입으로 이어질 수 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1987년의 상황과 2016년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무엇보다 그때 있던 중요한 두 가지가 지금은 없다. 첫 번째, 1987년엔 시민들이 호명하는 민주체제의 핵심 내용 하나가 그들 사이에 거의 완벽하게 공유돼 있었다. 바로 국민 직선 대통령제였다. 지금은 대통령 4년 중임제, 의원내각제, 분권형 대통령제 등 권력구조의 여러 대안들이 여러 세력에 의해 경쟁적으로 제시되고 있을 뿐 사회적 합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선거제도 대안에 관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두 번째, 1987년에는 ‘3김’이라는 거물이 존재했다. 3김에게는 그들 간의 합의가 정치사회 전체의 합의로 여겨질 정도로 시민사회가 부여한 권위와 카리스마가 있었다. 87년 체제가 6·29선언 4개월 만에 출범할 수 있었던 이유다. 지금은 여야에 걸쳐 수많은 잠룡들이 널려 있지만 누구도 3김 정도의 권위와 대표성을 지니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니 그 많은 사람들 간의 합의도 어려울뿐더러, 설령 그들이 어렵사리 합의한들 시민사회가 그것을 인정해줄지도 의문이다.

현 상황에서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의 모델과 구현 경로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내려면 그 작업에 매진할 수 있는 별도의 기구가 필요하다. 물론 거국내각의 형태로 과도정부가 구성된다면 그 정부가 바로 그러한 기구로서의 역할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박 대통령은 헌법에 명시된 필요최소한의 권한 외에는, 내·외치 구분 없이 조각권을 포함한 모든 것을 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에 공식적으로 이양해야 한다. 그래야 과도정부가 정국 변화나 돌발변수의 개입 등으로부터 자신의 권위를 최대한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체제 전환작업에 임할 수 있다. 또한 과도정부의 임기는 가급적 길게 부여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여러 대안에 대한 충분한 학습과 토론이 이뤄지고 공론의 형성과 정치사회적 합의가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기대할 수 있다. 부디 과도정부가 올바로 세워져 진상규명, 국정운영, 새로운 체제 마련 등 역사적 소명을 박 대통령의 남은 임기 동안 충실하게 수행해 나가기를 바란다.

최태욱 |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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