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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가 긴 여정의 버스를 타고 하염없이 앉아 있습니다. 버스가 중간중간 여러 정류장과 휴게소를 들러도 사내는 요지부동 앉아만 있습니다. 곁에 앉은 여인이 궁금해 물어봅니다. 사내는 죄를 짓고 4년 복역 후 고향집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출소 전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고 했습니다. ‘나를 용서한다면 마을 어귀 정류장 앞 커다란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 하나를 걸어놔 주오.’ 손수건이 보이지 않으면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어디론가 떠날 예정이랍니다. ‘브로크릴’이라는 마을이 다가올수록 사연을 들은 승객들이 모두 차창가에 붙어 앉아 초조해합니다. 어느 순간 ‘와’ 하는 소리들이 터져 나옵니다. 참나무엔 노란 손수건이 가득 걸려 있었습니다.

‘노란 손수건’이라는 제목의 위 이야기를 중학교 시절 읽고 혼자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O 헨리의 ‘마지막 잎새’라는 단편소설도 어린 날 울린 이야기입니다.

1900년대 초반 뉴욕.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한 빌리지 3층. 친구와 세를 든 존시는 추운 겨울날 폐병에 걸리고 맙니다. 존시는 창밖 붉은 벽돌 담장에 매달린 담쟁이덩굴 잎 다섯 개가 모두 떨어지고 나면 자신도 죽을 거라 합니다. 한 잎 두 잎 담쟁이넝쿨 잎이 집니다. 존시도 따라 말라갑니다. 그런데 마지막 남은 잎새 하나가 벽을 움켜쥐고 끝내 떨어지지 않습니다. 용기를 얻은 존시도 천천히 건강을 회복해 갑니다. 아래층에는 괴팍한 화가 베어먼이 살고 있었습니다.  남을 비웃으며 살아가는 실패한 늙은 화가였습니다. ‘마지막 잎새’는 존시를 위해 베어먼이 담장 위에 그린 마지막 작품이었습니다.  차가운 비바람과 눈을 맞으며 날을 꼬박 새워 ‘마지막 잎새’를 그린 베어먼은 급성폐렴에 걸려 자신의 가난한 방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합니다.

촛불혁명도 이루고, 박근혜, 김기춘, 이재용 등도 감옥으로 보내고, 새 정부도 들어선 격동의 한 해. 며칠을 남겨두고 왜 이런 이야기를 떠올리느냐고요. 왜 이렇게 슬픈 이야기를 하느냐고요. 오늘도 서울 목동 서울에너지공사 75m 공장 굴뚝에 올라가 있는 스타케미칼(현 파인텍)의 홍기탁과 박준호가 떠올라서입니다. 이 추운 겨울날 비닐 몇 장에 기대 살아가는 그들이 이 황폐한 시대의 ‘마지막 잎새’ 같고, 마지막 희망을 지켜보려는 ‘노란 손수건’들 같아서입니다. 그들은 지난겨울 역시 꼬박 ‘박근혜 퇴진 광화문 캠핑촌’에서 노숙을 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지지난 겨울엔 경북 구미에 있는 스타케미칼 문 닫힌 공장 굴뚝 고공농성장 아래에서 노숙을 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2015년 동료 차광호의 408일 동안의 고공농성 끝에 고용, 노동조합, 단체협약 승계에 합의해 내려왔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한국합섬이 폐업하고 난 후 장장 10년에 걸쳐 고용승계를 외치며 길거리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언제 공장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에둘러 말하지 않고 얘기하면 그들처럼 가파르게 살아가는 우리 시대 노동자가족들의 변하지 않는 현실이 떠올라 슬픕니다. 0.1%도 안되는 재벌과 대주주 가족들의 무한한 행복의 독점을 위해 겨울 담쟁이넝쿨처럼 말라가는 수많은 인간가족들의 풍경이 아파서입니다. 누군가 떨어져 죽었다 해도 눈 하나 줄 겨를 없이 살아가는 이 광폭한 신자유주의 시대 삶의 풍경이 아파서입니다. 누군가를 보듬기 위해서가 아니라 떨구어 내기 위해서 이전투구로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이 경쟁의 시대가 아파서입니다. 촛불혁명을 이루었다지만 평화와 평등, 모두의 안녕을 향해서는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는 정치사회 현실이 아파서입니다.

그래서 다사다난했던 2017년의 마지막 주말인 12월30일 올해의 마지막 촛불을 들자고 제안해봅니다. 스타케미칼 노동자들의 도합 457일의 고공농성 숫자와 같은 사회 각계 457인의 제안자들이 먼저 나섰습니다. 혁명은 어디로 가고 있냐고, 혁명은 어디에 있는 거냐고 물어보는 날입니다. 오후 2시 국회 앞에서 모여 행진을 해 75m 공장 굴뚝 아래까지 갑니다. 절망을 떼어내고 희망을 매달기 위해 갑니다. 그 절망에서 그만 내려도 된다고 굴뚝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안양천변 가로수들에 걸어 줄 손수건 한 장씩만 들고 나와 주십시오. ‘노란 손수건’이면 더 좋겠습니다. 그 ‘노란 손수건’ 하나하나가 굴뚝 위의 두 노동자들을 넘어 이 척박한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마지막 잎새’가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당신과 내가 서로에게 그 ‘노란 손수건’이 되어 주고, ‘마지막 잎새’가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는 그런 좋은 세상을 그려보는 새벽입니다.

<송경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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