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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여자에게는 남자와는 다른 촉이 있다니까요!” 부부 사이의 고충을 말하는 예능 방송에서 남자, 여자 그리고 좀 다른 말을 하라고 앉아 있는 전문가들까지 ‘여자만의 무엇’이 있다면서 맞장구다. 여자들은 자신의 ‘감’이 맞아떨어진 사례를 말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남자는 ‘여자의 신통한 재주’를 인정하는 듯 머리를 긁적거린다. 얼핏 그 장면만을 보면 남자라는 존재는 여자 손바닥 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꼴이다. 방송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여성만의 직감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많다. 여자를 무능력하게 묘사한 기존의 경우와는 다른 성별 특성 구분이기에,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이 이 ‘슬프고도 위험한’ 말을 종종 내뱉기도 한다.

여자만의 촉은 지독한 성차별의 ‘결과’이기 때문에 슬프다. 이 신화를 가능케 한 일상의 사연들은 철저히 시간과 공간이 제한된, 그러니까 여자가 사회적 활동이 자유로운 반대편을, 그러니까 남자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를 의심하는 형태다. 육아와 집안일을 책임지는 사람이 평일 저녁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니, 남자는 애초에 의심의 안테나를 펼칠 이유가 없다. “당신 지금 어디야!” “누구와 있는지 솔직하게 말해!”라는 불신의 눈초리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불리한 쪽에 있는 사람의 불안일 뿐이다.

이 역사의 장구함 덕택인지 비슷한 고민을 공유하는 커뮤니티에서는 남편이 수상할 때 던져야 하는 ‘예리한 질문’ 목록들이 집단지성의 힘으로 완성된 상태다. 이를 실천하다 보면 남자의 사소한 행동과 흔적들에서 중요(?) 증거를 발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결과를 보면서 여자든 남자든 ‘역시 여자에겐 촉이 있어’라는 담론을 주변에 퍼트리니 성별 고정관념은 견고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여자들이 남자와 다르게 화장실의 평범한 구멍 하나에도 예민한 이유는, 본능이어서가 아니라 그곳에 카메라를 설치하는 이상한 사람들(주로 남자), 또 그 영상을 보는 사람들(주로 남자)이 많은 사회에서 보호받지 않는 존재로 살고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게다가 여자 ‘촉’ 우월성 긍정 논리는 성차별의 ‘원인’이 되기에 위험하다. ‘감’에 대한 찬사는 여자를 ‘섬세하고 감정적인’ 이미지로 포장하는 수순으로 이어져 바로 그 특징 때문에 일터에서 차별을 정당화한다. 엎친 데 덮친 격은 차별의 원인이 차별의 ‘극복’ 소재로 회자되는 경우가 많다는 데 있다. 조직사회에서 높은 위치에 오른 여성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의 경쟁력을 ‘엄마의 자상함과 여성의 섬세함’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엄마처럼 주변 사람들을 보듬어주고, 작은 것을 놓치지 않는다면 불가능은 없다나 뭐라나.조직사회는 자상함과 섬세함을 지닌 이들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감정보다는 논리를 우선시하며, 작은 것보다는 전체를 조망할 줄 아는 능력을 우대한다. 결국 여자만의 촉이 있다는 말들이 모이고 모일수록 남자들이 ‘더’ 일터의 적임자로 대우를 받게 된다. 여자는 직장의 어머니 혹은 꽃으로서 존재는 하겠지만 유리천장의 틈새를 통과한 자는 언제나 소수다. 누군가가 천장의 가운데를 깨려고 하면, 그렇게 칭찬받던 감정과 섬세함이라는 특징은 ‘여자들은 작은 것에 트집 잡다가 중요한 것을 놓친다’는 말로 둔갑하여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자는 기만적인 이유를 등장시킨다.

그 차이는 자연스레 여자가 육아의 적임자라는 케케묵은 고정관념으로 이어진다. 아이, 특히 갓난아기를 돌본다는 것은 종일 사소한 것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고 이 지루한 시간을 감정의 충만함으로 버티는 것 아닌가. 결국 경력단절은 일하는 것으로도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여자만의 선택이 되고 기울어진 운동장의 한편으로 밀려난 이들은 늘 남자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가 궁금할 뿐이다. 그래서 오늘도 자신의 ‘촉’을 발휘하기 바쁘다.

<오찬호 |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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