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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시절에 나는 장학금을 자주 받았다. 그것도 대학원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장학금이었다. 돈 받았다고 연구 성과를 억지로 내야 할 부담이 없으니 누구나 군침을 흘렸다. 하지만 이런 장학금은 자수성가한 기업인이 후원하는 형태가 많아서 수혜자의 조건이 굉장히 선명해야 한다. 학교 관계자나 학과 교수가 해당자를 추천하는 간단한 절차지만 고배를 마신 자를 납득시킬 이유가 로또 당첨자에게 있어야지만 논란이 발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바닥에서 최고의 적임자였다. 이유는 내가 힘든 환경에서도 성실하게 살고 있음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어서였다. 나는 고시원과 옥탑방에서 5년을 살았고 그 시절 내내 신문배달을 했다. 다른 사람보다 형편이 나빴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상황이 풍기는 상징성이 고만고만한 무리들이 모인 곳에서 군계일학이 되기에 충분했다. 장학금을 추천하는 자가 새벽 2시부터 신문을 배달하고 학교에 와서 강의를 듣는 나를 먼저 떠올리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행운이 자신에게 오길 기대했던 이들은 수군거렸다. 오찬호가 실제로는 나름 중산층 집안인데, 단지 독립심이 강해서 일부러 힘들게 사는 거라는 놀라운 이야기도 부유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그날은 내가 뮤지컬을 생애 처음으로 관람하기로 한 날이어서 무척 들떠 있을 때였는데 누군가의 비꼼은 비열했다. “완전 부르주아네. 가난하다면서 장학금은 다 챙겨 먹고 할 거는 다 하고 사네.”

장학금 받는다고 눈치 보고 살아야 하냐고 따졌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장학금으로 생활의 품격을 넓히는 게 무슨 문제냐고 설명해야 했지만 행동의 반경이 제한되는 게 가난의 자격이라고 믿는 사람을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다. 뮤지컬 세계를 직접 눈으로 볼 기회도 포기했다. 그래야만 불평등을 비판하는 ‘노동하는 대학원생’의 성실한 모습이 유지되었다. 누가 보더라도 장학금을 받는 사람답게, 신문배달부답게 살아야지 무탈했다. 그렇게 나는 개인의 문화 향유가 깊어질 수 있는 중요한 순간에서 멀어졌다.

부메랑은 날카롭게 돌아왔다. 시간강사가 되어 ‘대중예술의 이해’라는 강의를 5년간 했는데, 이때 학생들로부터 자주 들은 말이 뮤지컬을 다루지 않아서 아쉽다는 거였다. 본 적이 없는데 제대로 접근하기가 쉽겠는가. 강의를 위해 뮤지컬 형태의 영화 &lt;레미제라블&gt;을 꼭 봐야 할 상황이 있었는데 노래만으로 서사가 전개되는 상황이 너무 낯설어 홀로 집중을 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진짜 뮤지컬을 본 것은 신문배달을 그만두고도 12년이 지난 올해 초다. 그것도 열한 살 딸이 <신과 함께> 뮤지컬을 보고 싶다고 했기에 가능했다. ‘영화와는 다른 뮤지컬만의 새로운 느낌’, 딸과 나는 이를 경험했다. 하지만 마흔 살이 넘어서야 노래가 가슴에 꽂히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된 나와 초등학생 때부터 예술의 추상성에서 구체적으로 감흥을 체험하는 순간을 차곡차곡 쌓아온 사람의 삶의 질이 같다고 할 수 없다. 예술의 궁극적 가치가 다양성의 미학이라는 점을 볼 때, 내 딸은 장학금과 뮤지컬 관람을 연결해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온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다룰 수 있는 세상을 꿈꿨던 진보정치인이 허망하게 우리 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노동자 대변하는 사람인데 가증스럽게도 아내에겐 전용 운전기사가 있다’는 나쁜 기사와 마주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보다 더 중요한 건 이 경악스러운 프레임이 곳곳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얽매여 그 사람을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계속 가난한 상태로 머무르도록 한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노회찬을 좋아한 이유는 추잡한 이미지 공작들 사이에서도 진보의 가치를 유쾌하게 전달했던 그의 입에서 진정한 행복을 상상할 수 있어서였다. 모차르트가 살던 시절도 아닌 2018년도라면 누구나 뮤지컬 관람을 할 수 있는 사회가 첼로를 연주할 줄 아는 그가 원한 세상일 거다.

<오찬호 |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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