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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일에 호기심 넘치던 이십대 초반에 페미니즘을 접했을 당시 내가 어떤 고민을 가졌는지 한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러다 십년이 훌쩍 지나 다시 마주한 페미니즘은 그야말로 ‘다시 만난 세계’였다. 두 번째 만난 글들은 이전의 나보다 지금의 나에게 훨씬 더 구구절절하게 와닿았고, 때론 가슴 깊이 찔러서 깊은 반성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다양한 삶의 경험이 쌓이면서 공감할 여지가 훨씬 늘어났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해방감을 느꼈다고 한다. 자신이 받아왔던 불편부당한 대우를 명확히 인식하게 되고 이를 말로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과정에서 힘을 얻어 스스로 아픔을 치유해가는 과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데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사람들끼리 ‘페미니즘을 만난 이후 삶이 더 편안해졌나’ 질문을 주고받아보면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사는 것이 복잡해졌다고, 예전에 비하면 아무것도 쉬운 일이 없다고 한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던지는 인사말도, 사사로이 던지던 농담도, 자녀와 나누는 대화도, 모든 것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고 어려워졌다고 한다. 이는 고민과 공부를 계속하면서 본인이 가진 권력을 깨닫기 때문일 것이다. 약자를 위한 정치학인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내 권력을 불필요한 곳에서 쓰지 않으려니 스스로의 말과 행동을 계속 점검하고 조심해야 하는 의무를 스스로 떠안은 셈이다.

얼마 전 친구들과 대화하다 우리 중 88서울올림픽을 직접 본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문화를 누리고 산 내 경험을 잠시나마 동시대인들 모두의 보편적 경험으로 오해했다. 내가 누리게 된 우연한 혜택을 ‘평균값’으로 여기지 않으려면 내가 가진 것들을 점검하고 그 안에 권력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시민단체 활동가이자 장애인 가족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등교육을 이수한 서울내기 이성애자인 나처럼 사람들은 다양한 기준에 따라 사회적 약자와 강자의 위치를 넘나든다. 가난한 노동계급의 남성이 어떻게 권력을 가질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는 권력의 방향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고려하지 못한 발언이다.

이 넘나듦을 이해하고 맥락에 따라 누구에게나 권력이 있기도, 때론 없기도 함을 인정해야 감수성을 기를 수 있다. 다른 경험을 갖고 각자 다른 존재로 성장한 개인들이 조화롭게 사는 사회를 기대한다면 예민한 감수성이 꼭 필요하다. 드러나지 않는 바탕을 이해하고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은 당장은 불편함을 만드는 존재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은 더 나은 개인의 삶이 보장되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바탕의 힘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온 문명의 역사는 잘못된 것을 깨닫고 고쳐온 과정이기 때문이다. 

‘잘 듣는 것’은 감수성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사람들이 무엇이 부당하다고 말하는지, 왜 잘못되었다고 말하는지에 대해 귀 기울여보아야 한다. 초등학교 사회책에나 등장할 만한 ‘범죄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와 같은 지극히 당연한 말들이 왜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집회 구호가 되었는지 우리는 다시 한번 들어야 한다. 정말 그 판결이 공정했는지, 그 판단에 부적절한 젠더권력이 들어가지 않았는지 모두가 함께 점검해보아야 한다. 가만히 앉아 숨쉬기도 힘든 이 여름날 거리로 나선 여성들의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지지 않으려면 개인의 감수성뿐만 아니라 우리는 국가와 사법부의 감수성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아동도 아니고 장애인도 아니고 학력도 좋으니 성적 자기결정권이 제한되는 상황에 있었을 리 없다는 판결문은 개인의 권력을 최고점과 최저점을 이은 한줄서기 어디쯤으로 보는 데서 오는 망언이다. ‘정조가 그렇게 중요했다면 왜 그러고 있었냐’는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재판부가 부디 감수성을 높이기를 바란다.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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