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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에서 의류 비즈니스에 종사하며 만난 특이한 인물이 있다. 이름은 사이먼. 만난 지 10년이 좀 넘었다. 70대 후반인 그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옷차림에 똑같은 인상이다. 빛바랜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사시사철 점퍼는 열고 다닌다. 코끼리 같은 몸집에 다리를 조금 절룩거린다. 주름이 깊게 파인 얼굴은 하얀 수염으로 늘 덥수룩한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는 모습은 일품이다. 그는 유대인이지만 나를 만나면 스님처럼 합장한 뒤 악수를 청한다. 그의 인사말도 늘 똑같다. “다음주는 네 비즈니스가 틀림없이 더 좋아질 거야.”

사이먼은 옷을 취급하는 도·소매 상인들에게 비닐백 등 장사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공급하는 업자이다. 도매상 중에는 유대인들이 많다. 내가 아는 유대인 도매상은 모두 사이먼과 거래를 한다. 토론토 유대인 커뮤니티에도 경쟁자가 있을 텐데 사이먼이 거의 독점을 하고 있다면 물건에 특별한 무엇이 있을 것 같았다. 가격과 품질이 뛰어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사이먼한테서 처음으로 물건을 받던 날 가격이 이상하다 싶어 그가 건네준 영수증을 다시 계산해 보았다. 사이먼은 물건을 싸게 준 것이 아니라 덧셈을 잘못해서 200달러 가까운 돈을 덜 받았다. “당신이 실수했다”며 돈을 더 주었더니, 사이먼은 두 손을 모아 내게 인사를 했다. 나에게 사이먼의 존재를 알려준 사람은 도매상을 운영하는 제이크였다. 역시 유대인인 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200달러는 사이먼에게 대단히 큰돈”이라며 그는 마치 자기 일처럼 고마워했다. 그참에 나는 궁금해하던 것을 처음으로 물어보았다. “당신들은 왜 사이먼한테서만 물건을 사지?” 제이크는 말했다. “사이먼이 좋은 사람이라서 그래. 나는 그를 30년 넘게 알아 왔는데 사이먼은 한결같이 좋은 사람이었어.” 제이크의 다음 말이 내게는 충격이었다.

“사이먼 물건은 언제나 품질이 좋고 가격도 좋아. 다른 데와 비교하지도 않지만 설령 그가 비싸게 받는다 해도 나는 그의 가격이 싸다고 생각할 거야.”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제이크는 사이먼의 평범하지 않은 삶에 대해 간단하게 말해주었다. 사이먼은 잘나가던 의류회사 운영자였다. 그의 사업체는 외부 요인 때문에 십수 년 전에 문을 닫았다. 사업이 잘될 때든 실패한 이후든 그가 토론토 유대인 커뮤니티에서 하는 일은 똑같았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발벗고 나선 일이다. 도움을 청하면 사이먼은 누구든 언제든 가리지 않고 응해 주었다. 수십 년에 걸친 헌신적인 활동 때문에 사이먼이라는 이름은, 의류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존경’ ‘신뢰’와 동의어였다. 그러니까 “사이먼 물건이 비싸도 그것은 싼 것이다”라는 말도 안되는 말이 말이 되는 것이다.

2018년 7월 넷째 주 닷새 동안 유례 없는 폭염 속에서도 6만여 시민이 분향소를 찾아 노회찬 의원을 추모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아파한 까닭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힘없어 억울한 사람들 편에 섰던 노 의원의 수십 년에 걸친 한결같은 활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너무나 꼼꼼하게 한결같아서, 모교 민주동우회(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을 돕고 기억하는 대학동문회)에까지 연회비 3만원을 십수 년 동안 꼬박꼬박 보내왔다고 했다. 본인은 양복 두 벌에 닳아빠진 구두 한 켤레로 살았으면서도 말이다.

나는 그의 죽음을 접하면서 토론토 유대인 커뮤니티의 사이먼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사이먼이 공급하는 물건은 무조건 싸고 좋다는 믿음은 수십 년 헌신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에서 연유한다. 노회찬의 죽음에 마음 아파하는 우리는 왜 살아생전 그에게 사이먼식의 존경과 신뢰를 보내지 못했을까? 그가 그것을 느끼고 자기의 진정성을 사람들이 알아주리라 믿었더라면 그의 선택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죽음이 그래서 더 애통하다.

<성우제 | 재캐나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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