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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시선

[시선]캐나다 남자

opinionX 2018. 8. 28. 10:56

“이곳에 서열이 있다는 거 알아?” 캐나다에 살러 온 직후에 만난 어느 선배가 대뜸 나에게 물었다. “서열이라뇨?” “캐나다에는 사회적으로 대접받는 서열이 있어. 어린이, 여자, 노인, 강아지, 그다음이 남자야.” 처음에는 물론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 나라에 살아보니 한국에서 온 보통 남자의 눈에는 이런 서열이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약자를 우대하고 우선시하는 사회여서 그런지 남자들은 이리저리 뒷전으로 밀리기 십상이었다. 이런 판국에 성추문을 만들기라도 하면 남자는 진짜 개만도 못한 대접을 받게 된다.

캐나다에서도 성폭력 뉴스는 심심치 않게 터져나온다. 최근 10년간 토론토 한인 동포가 성범죄 혐의로 기소되어 떠들썩했던 사건도 두 건이 있었다. 첫번째 사건은 20대 남성 6명이 같은 교회 내 또래 여성들을 성폭행했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이 사건을 기소(캐나다 경찰은 기소권을 가지고 있다)하면서 피의자들의 신상을 바로 공개했다. 언론 매체는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1면 머리기사에 올렸다. “추가 피해자들이 있으면 신고하라”는 경찰의 요청 또한 빠뜨리지 않았다. 다름 아닌 교회 안에서 벌어진 사건이어서 파장은 더 컸다. “증거가 무엇이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담당 경찰은 “복수 피해자들의 일관된 진술이 증거”라고 답했다.

두번째 사건은 어느 학원에서 발생했다. 10대 여중생이 남성 학원 원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경찰에 신고한 사건이었다. 미성년자가 관련되어 사건의 파장이 만만치 않았다.

기소 이후 두 사건은 공교롭게도 똑같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첫 번째 사건의 경우, 피해자들의 진술이 번복되고 엇갈리는 바람에 무고로 판명났다. 두 번째 사건은, 학원 안에 설치된 CCTV 덕분에 원장이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그런데 공통점은 더 있었다. 두 사건 모두 피의자의 잘못이 없다고 밝혀졌지만 그 남성들을 음해하려 했거나 오해를 해서 신고한 여성들은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캐나다에는 한국의 무고죄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피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허위 신고자와 경찰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것 외에는 없다.

이들이 성폭력으로 기소되었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언론매체 가운데 ‘무혐의 처분’을 보도한 곳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지은 죄가 없는데도 ‘성폭력으로 기소되었다’는 기록은 삭제되지 않고 경찰 파일에 그대로 남았다. 그 기록 때문에 당사자들은 취업 등을 할 때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그들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이 나라에서는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다. 무혐의로 밝혀져도 이러하니, 진짜 범죄자들에게 어떤 중벌이 내려지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일반 직장에서는 ‘성희롱했다’는 지적을 받으면  직장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다. 개인 컴퓨터로 미성년자 포르노를 본 흔적만 있어도 직장에서 바로 잘린다. 식당에서든 술집에서든 성희롱·추행 등으로 경찰에 일단 신고가 되면 인생이 피곤해지는 것을 넘어 평탄한 인생을 살기가 어려워진다. 기소되자마자 얼굴과 이름이 만천하에 공개되어 온갖 창피를 다 당하고, 벌금과 징역 등의 중형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허위 신고로 인한 부작용이 만만치 않은데도 성폭력을 다루는 캐나다 시스템은 요지부동이다. 부작용이 따른다 하더라도 강력한 대처로 얻는 것이 훨씬 더 많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진짜 피해자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자도 좋아서 한 거 아니냐?” “꽃뱀 아니냐?” 따위의 이른바 2차 가해도 있을 수 없다. 그런 말을 공개적으로 했다가는 성희롱으로 즉각 기소될 수 있다. 한국에서 40년을 남자로 살다온 내 눈에는, 캐나다가 처음에는 조금 이상한 나라로 보였다. 그런데 십수년 살면서 보니 알겠다. 약자를 이런 식으로 보호하니까 선진국 소리 듣는 것이다.

<성우제 | 재캐나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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