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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된 고정관념이 일상에 얼마나 만연한지를 확인하는 글쓰기 강의를 대학에서 하고 있다. 만연하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로서 살아가기도 하지만 그만큼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이상한 문화를 쉽사리 거부하지 못한 채 관성에 젖어 저지르는 자신의 과오를 ‘모름지기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많다. 나는 학생들이 사회학을 현미경 삼아 자신의 순간순간을 관찰하여 차별과 혐오의 씨앗을 발견하고 성찰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학력차별에 둔감한, 성별 차이를 분류하는 데 익숙한, 거대 자본의 소비문화에 길들여진 ‘한국 사람들’에 자신이 예외일 리 있겠는가.

솔직한 자기 고백을 글로 표현하는, 방향성이 비교적 명료한 수업이지만 도무지 적응이 어렵다는 ‘요즘’ 학생들이 많다. 대면 첨삭을 하는데 이렇게 토로하는 취업준비생이 있었다. “태어나서 한번도 그런 글쓰기를 해 본 적이 없잖아요.” 그런 글이란 무엇이냐고 묻자 사회적 의미를 듬뿍 담은 답이 돌아온다. “스스로가 보잘것없다고 말해야 하잖아요. 이 수업의 글쓰기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경쟁하는 식인데, 그건 우리 세대에 금기잖아요.”

어떤 식으로든 ‘긍정의 기운’이 넘실거리도록 한쪽의 방향으로만 글쓰기를 해서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야 하는 요즘의 취업 준비를 생각하면 얼토당토않다고 할 수 없는 하소연이었다. 이들에게 부족함은 극복했을 때나 혹은 극복 중일 때만 스토리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이를 거부하고 자기를 있는 그대로 소개하는 순진한 자기소개서는 없다. 언제나 자신의 장점만을 도드라지게 다뤄야 한다. 단점을 나열한다는 건 ‘귀사에 입사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요구하는 장점이 시민으로서 지녀야 할 덕목이면 애써 자신을 포장하는 게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그렇게라도 모범상이 만들어지고 모두가 이를 좇는다면 인류는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자기소개서에서 다루어야 할 장점은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과 무관하다. 경쟁과 승자독식을 인정하고 학력차별이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는 소신을 지녔다는 문장만이 공백을 채우는 데 허락된다. 협력의 정신은 내부고발은 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서 강조되어야 하며, 성차별은 반대는 하지만 전통을 존중하기에 예민하게 굴지 않겠다는 각오를 드러내야 한다. 이런 태도는 사회 탓은 하지 않고 열정으로 도전하겠다는 그릇된 ‘외향성’ 신화와 결합하여 바른 가치로 둔갑한다.

취업이야 언제나 기득권의 눈치 보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굴욕을 겪는 시기가 너무 빨라졌다. 대학입시는 물론이고 고등학교 진학에도 지켜지지도 않을 학업계획서와 자기부정의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야 한다. 그러니 고등학생들이 전문 컨설턴트에게 상담을 받고 이를 인터넷에서 공유한다. 이제는 학생들끼리도 이런 분류가 익숙해져서인지 학생회나 동아리 가입에 자기소개서가 요구되는 지경이다. 중학교에서도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라고 해서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이들이 자신을 허상으로 만들어야 하는 고뇌에 빠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포장지로 자신을 덮을 수밖에 없는 게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사람의 팔자일지도 모르나 그 허무를 이른 나이에 마주한다는 건 우려스러운 일이다. 어른들조차 자신들의 장점이라고 포장하면서 떠벌리던 ‘버티기’를 하려다가 이리저리 치여서 힘들어한다. 그래서 산골짜기 묵언 수행자들이나 실천할 수 있는 삶에 득달할 방법을 찾으면서 무너진 자존감을 애써 끌어올리려고 발버둥인데, 이 모순을 사회로 들어오기 전부터 뼈저리게 느끼는 자들이 남은 생애 동안 기성세대와 공동체를 불신하고 나아가 자신조차 혐오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성찰의 자기소개서가 아닌 패기의 기운만이 지배하는 자기소‘설’서 과잉의 시대가 만든 끔찍한 결과다.

<오찬호 |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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