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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 조합장 선거를 치르고 있다. 보궐선거. 지난 조합장 선거부터 전국동시선거로 했던 것이라 예정대로라면 내년에 해야 하는 것인데, 안타까운 사정이 있어 우리 지역에서 보궐선거가 시작되었다. 악양면은 모두 해서 2000가구가 조금 안 되는데, 농협 조합원은 1500명쯤이다. 네 집 가운데 세 집, 농사가 있으면 대개는 조합원이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이곳 농협 조합은 규모가 작은 편이라 몇 번이나 합병 권고를 받은 적이 있다. 그렇게 작은 조합인데도, 조합장이 되면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이 적지 않다. 쓰는 돈이며 부리는 사람을 따지면, 이곳 말로 ‘면장 위에 조합장’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농협이 공공기관이나 다름없다고 느낀다.

시골에 내려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조합장 선거가 있었다. “광진아, 내 좀 보자. 나와 본나.” 영 다정한 말투에 조금 어리둥절해 있었는데, 악수를 하는 손에 5만원짜리 종이돈 몇 장이 돌돌 말려 있었다. 조합장 선거는 전혀 관심 밖이었던 때라, 손바닥을 펴 보고는 영문을 몰라 빤히 돈을 쳐다보았다. 돌돌 말린 것을 한 장씩 한 장씩 다시 펴면서 물었다. “제가 뭐 빌려드리거나 한 돈이 없는데요?”

농협 조합장 선거는 2015년부터 전국동시선거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 관리를 시작했다. 그동안 치렀던 선거가 너무나 드러나게 돈 선거였기 때문. 조합장 선거하는 것을 두고 몇 억 낙선, 몇 억 당선 하는 말이 공공연했다. 선관위에서 보궐선거 설명회를 한다길래 가서 들어보았는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첫번째 드는 생각은 조합장 선거라는 것이 그동안 돈 선거를 해 왔으니까, 이제 선관위에서 관리하는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게 선거 규정의 거의 전부였다. 선거에 나온 사람이나 투표를 하는 사람이나 투표소에서 종이에 도장 찍는 거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다. 할 수 있는 선거운동은 선거 벽보 3곳 부착, A4 4쪽짜리 홍보물 1개, 후보자 본인 전화로만 발송할 수 있는 문자, 후보자 직접 통화, 후보자가 길거리에서 돌아다니며 인사하는 것. 이만큼이다. 단 한 사람 선거운동원도 둘 수 없고, 식구가 함께 다녀도 안 되고, 조합원의 집을 방문하는 것도 안 된다. 선거운동 기간은 13일인데, 그 기간 자기 집과 논밭에서만 지내는 조합원한테는 얼굴 한 번 내밀 수 없는 규정이다. 선거 나온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있어야 돈 써서 표 사는 짓을 안 할 수 있지 않나. 농협 조합장 선거가 공직 선거보다 후보자를 더 꽁꽁 묶어 놓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적어도 조합원한테는 그렇고, 정책으로 조합장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그렇다. 다른 누군가한테는 안 그렇겠지만.

지난 선거가 끝나고 다음날 아침, 사람들이 모여 선거 얘기를 했다. 누가 몇 표 얻었다 하는 얘기에, 모였던 사람들 모두 잠시 정적. 추측을 하자면 한결같이 뜻밖의 결과여서 그렇게 놀란 눈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돈 주면 받고, 받으면 받은 만큼 찍는 것이 조합장 선거 풍토였으니까. 선거를 치르는 경험은 많지 않다. 투표를 하는 사람은 조합장 선거 다르고, 공직 선거 다르고, 이렇게 잘 생각하지 않는다. 선거는 선거. 돈이 더 많이 돌아다니는 선거가 있고, 그렇지 않은 선거가 있다. 경남 하동은 지난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공천이 무산되었다. 공천을 받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대거 무소속으로 나왔고, 결과는 전국 최고의 부정선거 고발, 적발로 이어졌다. 공직 선거 규정으로, 선관위가 관리를 해도 이런 결과가 벌어진다.

이번 선거에서는 후보자 벽보보다, 선관위 현수막이 훨씬 잘 보인다. 정작 선거에 나온 후보자는 현수막을 걸 수도 없으니까. 투표를 하는 조합원 평균 나이는 일흔을 바라볼 텐데, 아침마다 후보자들이 보내는 장문의 문자 알람이 오면 천천히 폴더를 열었다가, 이름만 보고는 닫을 때가 많다. 선관위에서 걸어 놓은 현수막 하나에 돈 선거, ‘스튜핏’ 어쩌고 하는 말이 할매 할배 등짝 위로 큼지막하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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