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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도 레퍼토리가 있다. 정치는 그 레퍼토리의 반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대한민국 정치도 마찬가지다. 전쟁과 산업화와 민주화와 세계화 같은 큰 정치사회적 변동을 ‘모두 겪은’ 나라의 정치질서는 대체로 그렇게 유지된다. 다만 반복되는 레퍼토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이번엔 좀 다를 거야” 하는 약속과 기대를 내세우며. 그 약속과 기대가 허물어졌어도 의제와 횟수와 타이밍과 실행 결과의 수준을 조절하면서 또다시 약속하고 기대를 갖게 한다. 정치가 바뀔 것 같으면서도 안 바뀌는 이유이다.

단지 정치의 고루함과 거짓됨과 무의미함을 지적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정치에 그 흔한 냉소를 보태기 위해 하는 말 역시 아니다. 다만 새로운 변동이 일어나지 않는 한, 또 그것에 부응하는 질서를 새롭게 만들어내지 않는 한, 지금의 정치에 기대할 수 있는 변화는 그 정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나마 제대로 이뤄낸다면 다행이라는 것이다. 특히 실행 결과의 수준이 국민 안전과 복리 증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말이다.

영수회담은 대한민국 정치의 대표적인 ‘레퍼토리’이다. 영수회담은 대통령과 주요 정당 대표가 만나 국정 전반에 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자리이다. 그런데 역대 영수회담의 결과를 살펴보면 별다른 성과를 낸 적이 많지 않다. 대통령과 정당 대표들이 입장 차이를 극복하고 국민의 안전과 복리의 증진을 위해 ‘전향적’ 결정을 함께 내린 적이 별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다고만 하면 정치권과 언론과 국민들이 관심을 기울여왔다. ‘혹시’ 하는 마음에 말이다. 한편으로는 대통령과 정당 대표들이 파트너십을 발휘하면서 경색된 정국을 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대통령과 정당 대표들이 긴장과 차이와 갈등을 드러내면서 정국을 한층 더 경색시키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대개의 경우는 후자였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다. 2005년 대연정 문제 때문에 만났던 노무현-박근혜 영수회담이 그러했고, 2013년 박근혜-김한길-황우여 영수회담이 그러했다. 2002년 김대중-이회창 영수회담이 그나마 예외적 사례로 꼽힌다. 공적자금 추가 투입과 남북경제협력자금 확보를 위한 추경 편성에 합의를 봤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대한민국 정치와 경제에 그리고 국민의 삶에 얼마나 실질적이고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는지는 미지수다. 그런데도 영수회담이라는 레퍼토리는 대한민국 정치에서 계속되어왔다. 참석자들이 (약화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위상을 강화하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13일 서울 여의도 한 식당에서 전직 당 대표 등과 오찬회동을 갖고 오는 17일 박근혜 대통령,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의 청와대 회동 안건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이번 박근혜-문재인-김무성 영수회담은 어떠했는가. 조절의 수준이나마 변화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있다! 의제를 경제살리기와 민생개선에 맞추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2013년 박근혜-김한길-황우여 영수회담 때처럼 처음으로 국회에서 개최한다거나, 생중계로 진행한다거나 등의 변화보다 훨씬 ‘유익한’ 변화이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만남의 형식보다 내용이다. 그러면 이번 영수회담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는가? 아니다! 변화에 대한 기대를 조절의 수준에 맞추었다 해도 성과는 너무나 제한적이다. 이전의 영수회담과 비교할 때,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이번 영수회담 역시 그저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고 위상을 강화하는 방편으로 주로 활용했다. 경제살리기-민생개선을 의제로 삼은 이유도 결국은 그것이었다.

합의문도 나왔는데 너무 짠 평가 아니냐고? 아니, 오히려 합의문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영수회담 주요 의제였던 공무원연금 개혁과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처리, 최저임금 인상 등에 대해 그저 절차와 방안이 중요하다는 것에 합의했을 뿐이다. 5500만원 이하 소득자에겐 세부담을 없게 하자는 것에만 확약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이 정도를 영수회담의 성과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아, 또 있다. 영수회담을 정례화하자는 것, 의제도 좁혀 대화하자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도 성과라고 해야 할 처지라는 말인 것인가, 대한민국 정치가? 지겨움이 확 몰려온다.


김윤철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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